野 “우리가 여의도 대통령” … 무기력한 與[홍영식의 정치판]
홍영식의 정치판
여소야대 정국이 된 지 1년. 요즘 정치권을 보면 여야가 뒤바뀐 것 같다. 21세기 정치학 대사전에는 야당을 이렇게 정의했다. “정당 정치에서 정권을 잡고 있지 않은 정당이다. 여당과 대립되는 말로 여당의 정책이나 시책 등에 대해 건전한 비판과 견제를 통해 여당의 잘못된 독주(獨走)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국가적인 폐해를 막는다.”
지금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에 이런 교본은 씨알이 먹히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독주하고 있다. 선거 연패에 대한 반성과 다수당으로서의 책임감은 일절 찾기 힘들고 집권당인 것처럼 행세하는 거대한 정신 승리에 빠져 있는 게 지금 민주당의 현실이다. 정청래 민주당 최고위원의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 최고위원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4일 국무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거부권을 행사하자 “이 정권은 끝났다”고 했다. 1년여 전 대선 직후부터 갖고 있었던 선거 불복 속내를 털어놓은 듯하다. 0.73%포인트 차이라는 대선 패배 숫자가 불러온 나비 효과는 거대 야당의 무한 질주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은 여당이었을 때는 포기한 양곡관리법에 대해 ‘원안+α’라는 더 강한 내용을 담아 다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행정부의 입법부 견제 수단인 거부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3권 분립의 기본을 망각한 처사다. 거부권이 예상되는 데도 방송법 개정안, 노란봉투법을 직회부해 밀어붙이는 것은 대통령의 독선, 입법권 무시 이미지를 씌우려는 정략이다. 검수완박(검찰 수사원 완전 박탈)법, 양곡관리법 처리 때 안건조정위에서 위장 탈당 등 꼼수를 동원했다.
야당이 직회부 가능한 상임위가 6개나 돼 앞으로 얼마나 더 입법 폭주가 이뤄질지 알 수 없다. 행정안전부 장관을 탄핵시킨 것에 머무르지 않고 대통령·총리·법무부장관·외교부장관·농림수산부장관 등을 줄줄이 탄핵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이러다가 윤석열 정부 임기 중에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말이 나올지 모른다는 소리마저 듣고 있다.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 국정 조사도 추진하고 있다. 상대국이 있는 외교 내용을 다 공개하겠다는 것은 세계 외교사에 있기 힘든 일이다.
대법원장 임명권·사면 제한, 3권 분립·헌법에 위배
민주당은 대통령의 대법원장 임명권을 제한하고 다른 나라와 맺는 외교 조약 문안까지 국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 대통령 보고 폐지, 대통령의 인권위원 임명 제한, 대통령 친족 특별 사면 제한 등 법안들을 줄줄이 발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3권 분립과 헌법에 위배된다. 대통령의 인사·사면·행정·외교권을 묶어 여의도에선 우리가 대통령, 집권당이라고 외치고 스스로 정의의 심판자로 등극한 것 같다. 이성과 사실을 압살하는 ‘스키조(정신분열)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초기 당시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이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하는 주요 법안들을 모조리 틀어막은 상황을 연상케 한다. 당시 노 대통령은 “대통령직 못 해먹겠다”며 답답해 했고 ‘셀프 탄핵’으로 이어지면서 2004년 총선에서 판을 뒤집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재명 대표 개인을 위한 로펌 일원이 돼 버렸다. 이 대표는 신뢰 자본이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됐는데도 사법 리스크 때문에 오매불망 대표직에 목숨줄을 걸고 있다. 정작 자신은 불체포 특권 포기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남의 당 의원한테는 적용하는 블랙 코미디 같은 일을 버젓이 벌이고도 70년 민주 정당 맥을 잇는다고 자랑하고 있다.
민주당이 이렇게 오만을 보이며 ‘20년 집권’ 큰소리를 떵떵 치게 하는 것은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이 워낙 X판이기 때문이다. 정치학 대사전에는 여당을 ‘정부를 지지하는 한 무리의 정당으로 정권을 담당하고 있는 정당’으로 돼 있다. 국민의힘은 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도부들의 개인 입 때문에 난리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한 웰빙 체질이다. 소수 여당이라면 결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여소야대’ 자조 속에 자취도 없다.
일찌감치 친윤 대 비윤(또는 반윤) 대결 구도에서 지지고 볶더니 전국 단위 선거에서 연승한 집권당이 몇 개월 만에 비상대책위위원회를 두 번이나 꾸린 것은 정당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다. 당 선거에서 패배한 비윤 세력은 팔짱을 낀 채 정권에 잽을 날리기 바쁘다. 우군이 아니라 적이다. 원내대표 경선에선 영남권 총선 공천을 보장한다는 윤재옥 후보에게 표가 몰리고 당 지도부는 영남 일색이 됐다. 당은 절박한데 모두 제 앞가림뿐인 것이다. 전당대회 직후 누리는 밴드왜건 효과는 어디 가고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민주당은 친명-비명이 싸우더라도 대여 공격에선 한 몸이다. 주69시간 근무제, 한·일 정상회담을 두고 똘똘 뭉쳐 줄기차게 공격하고 있다. 좌파 방송들이 판을 깔아주면서 평의원, 야당 성향 패널들은 살판이 났다. 반면 국민의힘은 지도부 이외에 평의원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대응 논리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주69시간·한일 정상 회담 대응 논리 빈약
민주당은 주69시간 일하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기본은 주 40시간 근무제이고 최대한 추가로 할 수 있는 게 그 시간이다. 그나마 주69시간 일하면 더한 만큼 쉬도록 돼 있다. 그런데도 주69시간 일할 판이라고 민주당은 선동하는데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여당 의원을 한 명 보기 어려운 지경이다. 대일 외교에서도 민주당은 팀을 꾸려 후쿠시마로 가는 등 연일 정치 쇼를 하며 여론을 잡고 있는데도 여당은 야당 탓, 언론 탓만 반복할 뿐 정교한 대응 논리도 없다. 주요 이슈에 대한 여야의 메시지 양 자체가 불균형이다 보니 국민의 귀를 누가 잡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여당 본연의 일인 국민연금 개혁 등 정권 개혁 어젠다는 손도 안 대고 있다. 외부 전문가에게 맡겨 놓았다가 전문가들도 포기하다시피하자 당에선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 전광훈 목사 한 사람을 두고 전·현직 대표가 입씨름을 벌이는 등 볼썽사나운 상황을 연출했다. 이러니 야당에서 “이 정권은 끝났다”는 노골적인 말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도 국민의힘에선 반박하는 의원 한 명 없다.
1년 뒤 총선에서 지면 “이 정권은 끝났다”는 말이 현실화되는, 여권으로선 악몽이 펼쳐지는데도 선거 승리 밑그림이 보이지 않다. 김기현 대표가 군기잡기에 나섰다는데 급선무는 근본 체질부터 확 바꾸는 것이다. 김 대표는 국민이 좋아할 의원 30명 감축안 이슈를 진작 던졌으면 여론의 박수를 받을 텐데 선거제를 논의할 전원위원회 개최를 목전에 두고 뒤늦게 이슈화하려다 보니 당 위기를 모면하려는 국면 전환용이라는 비판만 듣는 것이다. 모든 게 한 템포 늦다.
청년 지지율이 떨어지니 청년 데이터 무제한 혜택 요금제, 신공항 특별법 등 세금을 퍼부어 환심을 사려는 야당의 포퓰리즘의 길에 동승하려고 한다. 야당에선 전국민 1000만원 대출, 은행 횡재세 갹출, 기초연금 인상 등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거나 시장 자율을 흔드는 정책과 입법들을 쏟아내고 있다. 여야는 이렇게 상대의 헛발질, 반사 이익에 기대는 좀비 정당이 돼 가면서 총선 포퓰리즘엔 한통속이다. 이러다가 내년 총선에서 무당층이 국민의힘과 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온다.
홍영식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및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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