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문제?…세계는 지금 ‘연금 전쟁’ 중
연금 개혁 후 국민 반발에 정권 바뀌기도
프랑스는 정년 연장 거부하고
한국은 정년 연장이 최대 복지, 나라별 개혁 상황 달라
[비즈니스 포커스]
프랑스 파리의 대표 번화가인 몽파르나스 지구. 4월 6일(현지 시간) 이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 ‘라 로통드’에서 불이 났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한 사이 연금 개혁 반대 시위대가 그의 단골 식당에 불을 지른 것이다. 소방대가 출동하며 화재는 금방 진압됐지만 300명 넘는 사람들이 방패를 들고 가게를 지키는 경찰과 충돌해 가게 앞은 아수라장이 됐다.
프랑스가 연금 개혁을 놓고 혼란에 빠졌다. 연금 개혁에 저항하는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올해 1월부터 이날까지 11번의 시위를 벌였다. 몇몇 폭력적인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최루탄과 섬광탄을 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체포됐고 수많은 경찰이 다쳤다.
3월 7일(현지 시간)엔 수도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전역 약 280곳에서 역대급 시위가 열렸다. 대중교통 노동자‧트럭 운전사‧원자력 발전소 기술자들 중 상당수가 파업에 들어갔고 초등학교 교사도 거리에 나왔다. 교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멈추고 발전소 가동이 일부 중단됐다. 청소 노동자도 시위에 동참하면서 파리 곳곳에 쓰레기가 쌓였고 쥐 떼까지 수시로 목격되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개혁에 정치 생명을 걸었다. 그는 “인기를 잃어도 국익을 선택하겠다”며 연금 개혁을 강행하고 있다.
◆연금 개편은 ‘화약고’
전 세계가 연금과 전쟁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가 2010년대 이후 고령층에 대규모로 편입되면서 연금 지급액이 급증했다. 선진국들은 기존 저출산 문제와 함께 부양비 부담, 노동력 확보 등 고령화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돈 낼 사람은 적어지는 데 돈 받을 사람은 많아지기 때문이다.
2010년대 그리스·포르투갈·이탈리아 등 몇몇 유럽 국가에서 재정 위기가 불거진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특히 그리스는 연금 지출이 국가 재정 적자의 50%를 차지할 만큼 부담이 컸다. 결국 2010년 어마어마한 재정 적자로 유럽연합(EU)에서 긴급 구제 금융을 받았다. 2018년 가까스로 구제 금융 체제에서 탈출했지만 그 과정에서 열 차례 이상의 연금이 삭감됐다. 월 700유로를 받는 연금 수령자는 수령액의 14%, 3500유로를 받는 연금 수령자는 44%가 깎였다. 연금 수령 연령은 65세에서 67세로 올렸다. 2010년 이후 지금까지 연금과 기타 복지 급여는 무려 70% 삭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연결됐다. 2012년 4월 생활고에 시달리던 70대 연금 생활자가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국회의사당 앞 신타그마광장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목숨을 끊었다. 전직 약사였던 그의 유서에는 “품위있는 노후를 위해 지난 35년 동안 연금을 부었는데 정부가 생존에 대한 모든 희망을 무너뜨렸다”며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구하는 비참한 상황이 되기 전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적혀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장 주변에 집결해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연금 개혁을 하려다 국민의 반발에 정권이 흔들린 사례도 적지 않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로마노 프로디 전 이탈리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 등이 연금개혁에 손을 댔다가 줄줄이 중도 낙마하거나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연금 개혁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독일은 사회민주당 소속이었던 슈뢰더 전 총리가 2003년 ‘더 내고 더 늦게 덜 받자’는 연금 개혁을 노동 개혁과 동시 추진해 고실업·저성장의 ‘독일병(病)’을 치유하는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노동자층의 민심을 잃으며 2005년 총선에서 앙겔라 메르켈의 기독민주당에 정권을 내줬다.
러시아의 푸틴 정부는 정년과 연금 수급 연령을 남성은 60세에서 65세로, 여성은 55세에서 63세로 단계적으로 늘리는 연금법 개정안을 2018년 6월 발표했다. 당시 러시아인의 90%가 개정안에 반대했다. 같은 해 7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에선 “푸틴은 도둑놈”이라며 연금법 개정 반대 시위를 벌였다. 80%를 웃돌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은 연금 개혁 발표 후 50% 이하로 떨어졌다.
같은 해 니카라과는 연금 보험료를 올리고 수령액을 줄이려다 최소 27명이 숨지는 유혈 충돌이 발생해 개혁을 포기했다. 네덜란드도 연금 수령 나이를 2021년 67세로 올리려던 계획을 2024년으로 연기했다. 반면 브라질에선 2019년 고속도로 점거 등의 거센 저항을 뚫고 연금 수령 나이를 단계적으로 연장하는 개혁에 겨우 성공했다.
스페인의 연금 개혁도 시한폭탄과 같다. 스페인 정부는 그동안 EU 집행위원회에서 코로나19 회복기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연금 개혁을 논의해 왔다. 65세인 현행 은퇴 연령은 그대로 유지하되 고소득자의 연금 기금 부담을 늘리고 노동자의 기여금 납부 기간을 25년에서 최대 29년으로 연장하는 것이 골자다.
정부는 연금 제도 개혁에 관한 노동계 지지를 무난하게 얻어 냈지만, 보수 야권과 재계는 이번 개혁안을 반대하고 있다. 개혁안이 고소득층과 기업의 부담을 늘리는 데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제1 야당인 보수 성향의 국민당(PP)은 연말 총선에서 집권에 성공하면 연금을 다시 개혁하겠다고 공언했다.
◆나라별 개혁 속사정은 제각각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보자. 프랑스의 개혁안은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연령을 기존 62세에서 매년 3개월씩 연장해 2030년 64세로 올리고 연금 100%를 받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을 42년에서 43년으로 늘리기로 약속한 시점 또한 2035년에서 2027년으로 앞당기기로 했다. 그 대신 최저 수령액을 월 1200유로로 상향하는 내용도 담았다.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정치인들은 무거운 접시를 나르고 대용량의 쓰레기 봉투를 옮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며 “노년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돈’보다 ‘정년’에 맞춰져 있다. 현재 프랑스의 은퇴 연령(62세)은 영국(66세), 이탈리아(67세) 등 다른 EU 회원국보다 낮다. 소득 대체율(연금액이 생애 평균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월평균 소득의 62%에 달한다. 정년이 노동에서 벗어나 비교적 넉넉한 은퇴 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계약’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이유다.
프랑스와 반대로 한국은 정년 연장과 고용이 최대의 복지로 여겨진다. 정년(60세)과 연금 수령 연령(65세) 사이의 공백이 있는 데다 연금만으로 먹고살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연구원 조사(2021년)에 따르면 특별한 질병이 없는 노년을 가정할 때 최소 노후 생활비로 개인은 월 124만3000원, 부부는 198만7000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2022년 1월 기준 전체 연금 수령자(582만1915명)의 월평균 연금액은 57만1945원이다. 최소 노후 생활비에 절반도 안 되는 셈이다. 국민연금 수령액이 20만∼40만 원인 사람은 약 40%(208만 명)나 됐다. 소득 대체율은 평균 31.2%에 머무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2.2%보다 11%포인트가 낮다. 한국의 연금 개혁이 ‘더 내고 덜 받자’에 유독 민감한 배경이다.
이 가운데 저출산·고령화는 세계 최악이다. 한국 합계 출산율은 2021년 0.82명으로, 2018년 이후 줄곧 1명 이하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2020년 OECD 회원국의 평균 합계 출산율은 1.6명이고 프랑스는 이보다 높은 1.8명이다. 이미 몇몇 초등학교는 문을 닫았다. 서울 노원구의 한 초등학교 입학생은 지난해 28명에서 올해는 17명에 불과하다.
고령사회 진입도 빠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고령사회에 진입한 한국은 2025년 초고령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영국(50년)이나 프랑스(39년), 미국(15년) 등 서구 국가뿐만 아니라 고령화 추세가 가파른 일본(10년)보다 빠른 속도다.
스웨덴·독일·일본 등은 각자의 사정에 맞춰 연금 제도를 바꿨고 현재도 손질 중이다. 윤석열 정부가 국민연금 개혁을 주요 국정 과제로 삼으면서 국회와 보건복지부에서 주요 이슈로 다시 다뤄지고 있다. 한국이 앞선 선진국들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되 한국 만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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