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그후, 장은 섰는데 한국영화가 안보인다

오경민 기자 2023. 4. 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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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일본 영화 선전 속 잇단 실패
인력·자금 모두 OTT로 이동
전통적 영화산업 입지 좁아져
관람료 인하 등은 미봉책 불과
중요한 건 결국 ‘콘텐츠의 질’
일본 영화 관객 점유율이 31.6%에 달한 지난달 22일 서울 용산구 한 영화관에 예매율 1,2위인 <스즈메의 문단속>과 <더 퍼스트 슬랭덤크> 예매 현황이 표시되고 있다. 한수빈 기자

한국 영화가 고전하고 있다. 초유의 사태다. 극장은 팬데믹 이전의 수익을 회복하는 중이지만 미국 영화 <아바타: 물의 길>, 일본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 등이 흥행하는 사이 한국 영화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최근 흥행에 성공했다고 할 만한 한국 영화는 지난해 11월23일 개봉한 <올빼미>가 마지막이다. 올해 개봉한 <교섭> <유령> <대외비> 등은 줄줄이 실패를 맛봤다.

매년 설 연휴는 한국 영화가 흥행하는 시기였지만 올해는 성적이 저조했다. 지난 2월 한국 영화 매출액은 팬데믹 이전인 2019년 동월의 9.2%(134억원)에 불과했다. 2월 흥행작 순위를 보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타이타닉(재개봉)> <아바타: 물의 길>에 이어 5위에 오른 <카운트>가 한국 영화 최고 성적이었다. 한국 영화 매출액 점유율(19.5%)과 관객 점유율(19.8%)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가동을 시작한 2004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팬데믹 충격으로 한국 영화가 개봉을 망설이는 사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등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가 흥행해 10년 만에 한국 영화 점유율 우위가 깨졌던 2021년(29.7%)보다도 낮은 수치다.

작품성을 인정받는 영화도 줄었다. 13일(현지시간) 발표된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한국 영화는 없었다. 한국 영화는 지난해엔 2편(<헤어질 결심> <브로커>)이 칸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좁게는 극장의 위기, 넓게는 영화의 위기로 각자 입장에 따라 다르게 사태를 해석한다. 배급사들은 당장 대작들의 개봉 일정을 정하지 못했다면서도 위기를 타개하고 수익을 회복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들을 고민하고 있다. 영화 관람료 인하나 정부 지원 등의 방안은 미봉책이라는 게 공통의 시각이다. 결국 관건은 ‘콘텐츠의 질’이라는 데 반성과 질책, 결의의 뜻이 모였다.

영화의 위기인가 극장의 위기인가

“큰 영화들이 개봉을 했지만 다 망했잖아요. 저희도 준비한 영화들 중 중소형 작품들을 봄에 풀어놓고, 대작을 여름에 내놓을 생각이었는데 1월부터 줄줄이 이렇게 되니까(흥행에 실패하니까) 힘들죠. 이제는 제작사도 배급사도 ‘이때 개봉하면 좋을 것 같으니 합시다’라고 먼저 나서서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서로 합의해야 영화를 내보낼 수 있는데 워낙 예측이 어렵다보니 다들 의기소침해졌죠. 업계 전체가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한 대형 배급사 관계자 A씨는 이렇게 말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청이 보편화돼 영화 소비 행태가 변화하고 관객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극장에서 거둘 수 있는 전체 수익 자체가 줄어들었다는 인식은 업계 모두 공유하고 있다. 또 다른 배급사 관계자 B씨도 “지난 3월까지 극장 성적을 보며 ‘관객들이 움직이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다 같이 알고 있는 상황”이라며 “좋은 영화가 한 편 잘되든, 지원금을 풀어서 잘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장이 반토막 났다. 배급사마다 가지고 있는 여러 편의 영화들을 배치해 한 해 가져갈 수익을 예측하며 전략을 짜는데 가져갈 수익 자체가 줄어든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콘텐츠 생산은 결국 사람과 돈, 두 가지로 이뤄지는데 사람과 자금이 OTT로 빠지고 있다. 영화는 어떻게든 계속 생산되고 어디에선가 소비되고 있는 것”이라며 “지금의 위기는 영화라는 콘텐츠의 위기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영화산업, 즉 극장의 위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극장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부터 <범죄도시2> <아바타: 물의 길> 등 ‘1000만 영화’는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로 쓴 <더 퍼스트 슬램덩크>나 입소문을 타고 흥행한 <올빼미>의 성과도 눈여겨볼 만하다. 관계자들은 정도는 달라도 여전히 ‘볼만한 영화’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를 보기 위한 관객들이 있다고 믿는다. OTT, 해외수출 등 수익 창출 방식이 다각화돼도 극장은 여전히 영화의 중요 승부처다. 배급사 관계자 C씨는 “극장에서의 흥행이 영화 수익의 마중물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극장에서 흥행할수록 OTT와의 협상에서 금액, 홀드백 기간(한 콘텐츠가 다른 미디어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등 조건을 논의할 때 협상력이 높아진다”고 했다.

영화 <밀수>는 오는 7월26일 개봉한다. NEW 제공.

작아진 극장 관객 규모에도 자신 있는 작품으로 관객을 모으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배급사 NEW는 류승완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등이 출연한 기대작 <밀수>의 개봉 일정을 7월26일로 지난 12일 확정했다. 성수기로 여겨지는 여름 시장 개봉작 중 가장 먼저 일정을 잡았다. NEW 측은 “개봉 일정을 정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밀수>가 극장에서 보기 좋은 영화, 여름에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 판단했다”며 “영화 시장이 경색된 만큼 우려 섞인 분위기가 감지되지만, 선제적으로 자신감 있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서 개봉 일정을 정했다”고 말했다.

팬데믹 시기 제작한 영화를 ‘재고 영화’ ‘창고 영화’라 부르며 낡은 작품으로 취급하는 시선에 반발하는 이도 있었다. C씨는 “원래 영화를 기획부터 개봉하는 데까지 주기가 2~3년씩 된다. 코로나19 기간 멈추지 않고 만든 작품들이라고 ‘낡은 작품’인 것은 아니다”라며 “촬영을 마친 작품들은 조금이라도 뒤떨어져 보인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편집과 VFX 작업 등 후반작업에 힘쓰고 있다. 따끈따끈한 신작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변혁은 위기에서…‘좋은 영화’는 살아남는다
변성현 감독의 신작 영화 <길복순>은 넷플릭스에 독점 공개됐다. 넷플릭스 제공.

영화계는 OTT를 단순히 적으로 보지 않았다. C씨는 “OTT가 (영화에)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다. OTT에서 한국 영화에 대한 니즈가 많다. 개봉 이전부터 물밑 협상이 많이 이뤄진다”며 “새로운 작품은 물론 예전 작품에 대한 계약도 이뤄지기 때문에 OTT 덕분에 K콘텐츠의 생명력이 길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극장 다음으로 안방과 OTT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OTT 진출을 포함한 다양한 유통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B씨는 말했다. 그는 “코로나19가 끝나면 예전처럼 돌아간다는 생각이 영화사업자들 사이에 팽배했다. OTT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했을 때 다양한 유통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렸다”며 “다만 한국 영화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체력은 탄탄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달라진 플랫폼 환경 및 소비자 패턴에 맞춰 다양하고 혁신적인 실험들이 진행된다면 한국 영화는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 영화는 볼 게 없다’는 관객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관계자도 있다. 투자배급사 관계자 D씨는 OTT 플랫폼이 강세인 현재 영화계 상태를 케이블과 종편이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던 2010년대 전후의 드라마 업계에 비유했다. 그는 “드라마 시장도 똑같았다. 지상파 드라마도 3사만 있을 때는 웬만하면 광고가 붙으니 어느 순간부터 작품을 안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며 “채널이 다양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런 드라마는 다 망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드라마 시장이 커졌고, 좋은 드라마도 굉장히 많이 나오지 않나”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 ‘그저 그런’ 영화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지금이 한국 영화의 질적 성장을 재고할 기회라고 역설했다.

“최근 나온 한국 영화들 중 가치 있는 영화, 볼만한 영화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시장 같았으면 100만 관객은 거뜬히 들고 손익분기점을 넘겼을 영화들입니다. 제작사들은 ‘이 정도면 잘 만든 영화’라고 내보내고, 극장에 걸면 사람들이 웬만큼 들고, 그럼 이런 영화 또 만들었겠죠. 그런데 솔직히 퀄리티에 문제가 있지 않나요? 이런 영화들 이제 그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 영화 변혁의 시기라고 봅니다. 변화는 위기에서 오거든요. 과도기이기 때문에 지금은 많이 힘들겠지만 언젠가 이렇게 됐어야 합니다.”

지난해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은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투자배급사 관계자 D씨는 앞으로도 국제적인 무대에서 주목받을 만한 ‘좋은 작품’에는 투자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AFP연합뉴스.

D씨는 “지지부진한, 어디서 본 듯한 영화들은 다 망하고 있다. 이런 영화들 만드는 이들이 사라지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살아남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 영화 시장과 콘텐츠 자체가 업그레이드될 것”이라며 “투자가 안 된다고 하지만 지금도 누가 봐도 좋은 프로젝트에는 투자사들이 몰린다. 칸이나 베를린 등 국제무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일 만한 프로젝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영화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관계자들은 티켓값 인하나 정부 지원금 마련 등 방안은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고 봤다. B씨는 “(개봉 촉진 지원금 등으로) 매듭 몇 개만 푼다고 풀릴 실타래가 아니다. 단기간에 좋아질 거라고 보지 않는다”며 “소비자 인식을 전환하고 행동을 유발해야 한다. (지원금 등이) 해법의 핵심은 아니다”라고 했다. C씨도 “여러 방안을 고민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배급사, 제작사마다 입장이 다른 만큼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희는 일단 좋은 작품으로 모멘텀을 만드는 게 1순위 과제”라고 했다. D씨는 “티켓값을 8000원으로 낮춘다고 관객들이 오는 게 아니다. 좋은 콘텐츠가 만들어질 환경이 되고, 실제로 만들어지면 1만5000원이라도 관객들은 올 것”이라며 “(정부 지원금 등) 돈을 푼다고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 [인터뷰] 박기용 영진위원장 “안일했던 영진위·영화계, 이젠 정말 큰 위기···정부 지원으로 투자 되살려야”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4170600011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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