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논단]巨野 입법질주와 대통령 거부권

여론독자부 2023. 4. 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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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권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양곡법 강행에 거부권, 정쟁 중심으로
野 '형식적 국면전환용' 입법 의구심
대통령은 '국정 미숙'으로 보일수 있어
상대방 몰아치는 극한게임은 피해야
[서울경제]
손병권

윤석열 대통령 및 국민의힘과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양곡관리법 개정안 통과,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그리고 재의결 추진 등을 거치면서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정부가 쌀 초과 생산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한다는 과도한 규정이 있어 정부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웠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이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을 ‘좋지 않게 본다’는 응답(48%)이 ‘좋게 본다’는 응답(33%)을 15%포인트나 앞서고 있다. 여러 요인이 복합된 결과로 보이지만 이러한 평가는 앞으로 민주당발 법안에 대해 대통령이 다시 거부권을 고려할 때 부담 요인이 될 수 있다.

현재 우리 정쟁의 중심이 된 거부권은 기원전 6세기 말 로마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귀족 대표인 2인의 집정관이 상호 견제하기 위해, 그리고 그 후 평민 대표인 호민관이 집정관과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의회정치의 본산지인 영국에서는 국왕이 의회를 통과한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다가 의회 우위가 확립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영국의 북미 식민지에서는 영국의 왕과 그의 대리인인 총독이 식민지 의회의 법률을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계속 활용했다.

미국 독립 이후인 1787년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 당시에는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대통령의 거부권 조항에 대한 헌법 제정자들의 반응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 각 주의 의회가 ‘지혜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다수 분파에 휘둘리는 상황을 목격한 헌법 제정자들은 새로운 연방의회가 행정부의 권한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대통령 단독 거부권을 두기로 했다. 다만 거부권은 식민지 당시 총독이나 영국 국왕이 행사했던 절대적 거부권이 아니라 양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기각될 수 있는 조건부 거부권이었다.

건국 초기 미국 대통령들은 법안이 명백히 위헌적이지 않으면 의회를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거부권 행사를 자제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앤드루 잭슨 행정부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정착된 양당 제도와 선거 정치 속에서 정책적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이제 거부권은 대통령이 의회를 견제할 효과적 무기로 일상화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무려 635회에 걸쳐 각종 거부권을 행사했고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대통령도 각각 78회, 36회 행사했다.

우리의 경우 1948년 제헌국회 당시 헌법 제정을 위한 본회의 논의 과정에서 유진오 헌법 전문위원은 한 의원의 질의에 대해 미국에서도 대통령의 거부권이 인정된다고 했고 대통령제를 표방한 우리의 제헌헌법도 이러한 거부권을 둔다고 답변했다. 일부 의원이 입법권의 침해 등을 이유로 이러한 권한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지만 거부권을 없애자는 취지의 수정안은 7월 5일 46표만을 얻어 부결됐다.

이처럼 견제와 균형을 표방하는 대통령제 국가에서 의회 지배 세력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과된 법안에 대해 대통령은 정책적 판단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거부권의 행사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거부권이 행사된 맥락과 거부권 이후의 정치적 전개 과정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대통령과 의회 다수 세력은 매우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대통령의 거부권을 유도해내는 것은 민생 법안을 저해하는 당사자가 대통령과 여당이라는 전략적 홍보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거부권이 뻔히 예상되는 법안을 반복적으로 추진한 후 재의결 절차까지 밟으면 이는 형식적인 국면 전환 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 대통령 역시 정책적 판단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연속적인 거부권 행사는 국정 운영 미숙 및 타협 능력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도로 제한속도가 시속 120㎞라고 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전자 모두 이 속도로 달리지는 않는다. 사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여지를 두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헌법적 제한속도의 극한으로 몰아넣는 초강성 게임은 피해야 한다.

여론독자부 opinion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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