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 학폭의 기억[광화문]
오랫동안 가슴 한 켠에 쌓아두고도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이 있다. 대부분 학교폭력(학폭)과 연관된 사건들이다. 그 출발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섭기로 소문 난 한 교사는 교실을 한 바퀴 돌며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학생들을 때리는 걸로 유명했다. 맞고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나라고 호통을 치며 무차별적으로 체벌을 가했다. 그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기만 해도 공포에 질렸다. 어떤 전후 사정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았지만 싸늘한 침묵 속에 한 친구가 끌려다니다가 쓰러진 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던 그날의 분위기 만큼은 지금도 숨이 막힐 정도로 생생하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일진 자리를 둘러싼 패싸움은 끊이지 않았고, 선생님들의 매질도 멈추지 않았다. 특히 학생들이 교칙을 잘 지키도록 감시하고 지도하는 권한을 학교로부터 위임받은 일부 선도부장들의 주먹질은 학폭의 상징처럼 각인됐다. 한번은 그들 중 한 상급생이 아침 자율학습 시간에 불쑥 들어와 시끄럽다면서 그 학급의 반장을 불러낸 뒤 올려부친 따귀 때문에 고막까지 파열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겐 별도의 징계가 내려지지 않았다. 자신의 운을 탓하듯 내키지 않아 보였던 "미안하다"는 말로 모든게 마무리됐다. 이후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학폭의 그림자는 도처에서 출몰했다. 요즘의 잣대로 보면 법의 심판대에 설 수도 있는 범죄였는데도 말이다. 폭력이 일상화된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였다. 오죽하면 한덕수 국무총리도 "미래의 인재를 교육시키고 바르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키우는 공간인 학교란 공동체가 학폭으로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했을까.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들을 무사히 건너온게 신기할 정도다.
한동안 잊고 지낸 이런 학폭의 기억들을 다시 소환한 건 넷플릭스 화제작 '더 글로리'를 보면서다. 극중 피해자 '문동은(송혜교 분)'이 '박연진(임지연 분)'이 주도한 가해자들을 상대로 처절하게 복수하는 과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한번쯤 겪거나 지켜봤을 과거 학폭 장면을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실제로 '더 글로리' 신드롬은 금새 꺼지지 않고, 사상 첫 검찰 출신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학폭 전례가 있는 아들로 인해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이슈로 옮겨 탔다. 뒤이어 정 변호사의 아들이 과거 고교 시절 학폭으로 강제전학 조치를 받았지만, 서울대에 합격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들끓었고, 재발 방치책 요구가 빗발쳤다.
지난 12일 발표된 범정부 '학폭 근절 종합대책'은 그런 압박의 산물이다. 전체적인 기조도 당연히 '온정주의'보단 가해자에게 확실한 불이익을 주는 '엄벌주의'에 방점이 찍혔다. 실제로 교육당국은 대학입시에 학폭 조치 사항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관련 보존 기간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기로 했다. 교육·사범대학은 전형 시 가해자에게 지원 자격을 아예 주지 않는 방안도 추진키로 했다. "과도한 처벌은 피해 사실의 인지와 반성, 사과, 피해자와의 관계 회복에 대한 노력을 자극하기보다 회피 전략을 부추길 뿐"이라며 부작용을 우려하는 교육계 안팎의 목소리도 있지만, 만연화된 학폭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원칙엔 토를 달기 어렵다. 최근 이화여자대학교 학교폭력예방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9명이 정부의 이번 대책을 지지하면서 더 강력한 조치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도 그 궤를 같이 한다.
이번 주말 종영한 인기 드라마 '모범택시2'의 명대사는 그래서 여운을 남긴다. "정의가 실종된 사회, 전화 한 통이면 오케이"를 전면에 걸고 억울한 피해자를 대신해 사적 복수를 완성하는 주인공 '김도기(이제훈 분)'는 악을 응징하는 순간에 이렇게 일갈한다. "기억해야 되찾을 수 있는게 있어. 기억했기 때문에, 니 놈들 앞에 내가 올 수 있었지"라고.
우리 사회가 학폭이 사라질 때까지 학폭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최석환 정책사회부장 neokis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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