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배·신] 1. 동해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

배상철 2023. 4. 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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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표적 된 ‘빨간 승용차·여성’ 17년째 못 맞춘 미제 퍼즐
2006년 3월 동해 약천마을 20대 여 피살
깊이 1m 안되는 우물 속 시신, 타살 초점
시신 발견 일주일 전 실종신고 동일 인물
성폭행 미수 그친 뒤 경부압박 질식 추정
3~4개월 사이 150m 이내 유사범죄 발생
강원청 미제사건전담팀 남성 DNA 확보
국과수 의뢰 대조군 찾는 등 ‘검거 총력’

강원도민일보 사건 담당 배상철·신재훈 기자가 ‘사건과 배·신’을 연재한다. 강원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뒷이야기부터 보도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숨겨진 사연들까지. 독자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는 사건 안팎의 소식을 깊이있는 분석으로 소개한다. 빨간색 승용차, 여성, 늦은 저녁. 2006년 3월 동해시의 밤을 위협했던 학습지 여교사살인사건을 추적해 본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 지리 우지진다’로 시작하는 시조의 창작지로 유명한 동해 심곡동 약천마을.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 선생이 머물면서 시조를 지었다고 해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다.

‘약천(藥泉)’마을은 뜻 그대로 ‘약이 되는 물’로도 유명하다. 고질병을 앓던 선비가 약천마을 우물을 마시고 건강을 되찾은 뒤, 벼슬에 올랐다는 내용의 설화가 구전을 통해 전해 내려올 정도다.

그런데 지난 2006년 3월 14일. 마을의 자랑이자 전설인 약천마을 우물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이날 처갓집 밭일을 도와주러 온 이웃주민이 갈증을 느껴 우물을 찾았다가 평소보다 물줄기가 약한 것이 이상해 우물 뚜껑을 열었는데, 여성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알몸 상태인 여성은 엎드려 웅크린 자세로 우물 위에 떠 있었다. 시신의 긴 머리카락 일부가 물이 나오는 파이프를 틀어막고 있었다. 이로 인해 물줄기가 약해져 있던 것이다. 최초 발견자는 처음엔 시신이 인형인 줄 알았다. 약천우물은 1m도 채 되지 않는 깊이. 성인 여성이 익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타살에 초점을 맞추고, 이 여성의 신원파악에 주력했다. 당시 우물에서 6㎞ 떨어진 시내에서 비슷한 연령대의 여인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확인결과 실종된 여인과 우물에서 숨진 여성은 학습지 교사 김모(당시 24세)씨와 동일인이었다. 김씨는 시신으로 발견되기 일주일 전인 3월 8일 오후 9시40분쯤 실종신고가 접수된 상태였다. 같은 날 오후 8시쯤 가정방문 학습지 수업을 마치고 회사 상사에게 전화한 김씨는 ‘집으로 퇴근하는 길’이라고 했으나 그날 밤 귀가하지 못했다. 경찰은 김씨가 실종된 날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마지막 수업을 한 학생의 어머니가 대접했다는 음식물이 사망한 김씨의 위 내용물에서 고스란히 검출됐기 때문이다.

부검결과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였다. 알몸으로 발견된 것을 봐선 범행 동기는 성폭행으로 추정됐지만,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누군가 김씨를 성폭행하려다 실패한 뒤, 목을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약천마을 우물에 유기한 것으로 판단했다.

수색에 나선 경찰은 김씨 시신이 발견된 다음날인 3월 15일 뜻밖의 단서를 찾는다. 동해체육관 앞 주차장에서 김씨가 타고 다니던 빨간색 마티즈 승용차를 발견한 것이다. 차량 뒷좌석에서는 실종당일 김씨가 입고 나간 속옷과 옷가지들이 나왔다. 그러나 범인은 차량 내·외부를 물로 닦아 흔적을 없애 추적할 단서는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수사는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김씨 시신이 발견된 지 3개월 후인 2006년 6월 1일 같은 동해시에서 유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약천마을과 멀지 않은 동해시 부곡동에서 한 주부가 자신이 몰던 승용차와 함께 낯선 남자에게 납치됐다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로부터 3주가 지난 6월 23일 밤, 동해시 부곡동 아파트 앞에서도 같은 유형의 범죄가 발생했다. 남편이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자 괴한이 조수석에 올라탄 뒤 운전석에 있던 40대 여성을 차에 밀어 넣고 납치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경찰은 김씨 살인을 비롯해 동일범의 소행을 의심하고 있다. 공교롭게 피해자들이 모두 빨간색 승용차를 타고 있었다. 범행시기도 3~4개월 사이 이뤄졌다. 사건은 모두 150m 이내에서 벌어졌다. 세 건 모두 범인이 흉기를 사용하지 않은 점도 동일범을 의심하는 근거다.

경찰은 수사력을 집중했지만, 범행발생 당시는 CCTV와 차량 블랙박스가 보편화되기 전이라서 범인의 흔적을 찾는데 난항을 겪었고 결국 17년째 미궁에 빠져있다. 강원경찰청 강력계 미제사건전담팀은 현재 이 사건에 모든 수사력을 기울이고 있다.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용의자의 연령과 인상착의 등을 파악한 상태다.

또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DNA를 확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해 대조군을 찾고 있다. 최근에는 연이어 사건현장으로 출장을 떠나는 등 해결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미제사건전담팀은 16건에 달하는 미제 살인사건 중 5건을 해결, 완전 범죄는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2003년 원주 학성동 다방 여주인 피살사건, 2004년 영월 영농조합 간사 살인사건, 2004년 삼척 노파 살인사건, 2005년 강릉 구정면 노파 살인사건, 2007년 화천 풍산리 노파 살인사건 등의 진범을 밝혀냈다. 더욱이 지난 2019년 DNA 분석기술 발달로 ‘화성연쇄 살인사건’ 진범인 이춘재를 검거하면서 전국적으로 미제사건 수사가 탄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강원청 미제사건전담팀도 한때 인력이 2명까지 줄었다가 이춘재 검거 이후 인원이 4명으로 2배 늘었다.

길영민 미제사건전담팀장은 “과학수사기법이 발전하면서 과거 증거물에서 확보하지 못했던 부분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동해 학습지 여교사 살해사건을 비롯한 도내 미제사건과 관련한 정보가 있다면, 강원경찰청 강력계 미제사건전담팀으로 제보해달라”고 당부했다. 배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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