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선거로 뽑는 왕
대통령제의 원조인 미국의 헌법을 보면, 의회의 권한은 많은 데 비해 대통령의 권한은 보잘것없다. 미합중국 육해군의 총사령관이 되지만 육군을 모집하고 해군을 창설하고 전쟁을 선포하고 육해군 통수에 대한 규칙을 정하는 것은 의회다.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는 국군통수권에 비하면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공무원에 대한 임명권을 갖고는 있지만 의회의 허락을 받아서 행사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통령에게 왕이 행사하는 은혜로운 권한인 사면권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대통령의 사면권이 수차례 행사되는 데 뭐가 흥미롭다고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대통령제는 엄격한 삼권분립을 토대로 할 때만 민주공화국 정부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대통령이 왕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엄격한 삼권분립을 유지하려는 미국 헌법이 대통령에게 사법부의 최종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사면권을 부여한 것이 흥미롭다.
미국의 독립전쟁 전후로 독립 후 어떤 정부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독립을 완수한 이후에도 영국의 왕을 상징적인 왕으로 모시자는 주장도 있었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평민이 왕을 단두대로 보내기 전에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유럽인도 국가에는 반드시, 최소한 상징적인 의미로라도, 왕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결국 영국의 예를 따라 의회에 많은 권한을 부여하여 국가 운영의 주도권은 의회가 갖도록 하되,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세습되지는 않고 선거로 뽑는 왕을 만들어냈다. 대통령제가 이렇게 탄생했다.
미국의 첫 번째 대통령은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 장군이다. 워싱턴 장군은 독립전쟁 후 귀향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군인은 전쟁이 끝나면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워싱턴 장군의 철학이었다. 이제 막 독립을 했지만 내부적인 통일이 쉽지 않았던 미국의 상황에서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워싱턴 장군에게 애걸복걸해서 겨우 대통령직을 수락하도록 만들었다. 4년 뒤 낙향하는 워싱턴 대통령을 다시 붙잡아 4년을 더 대통령을 하게 만들었다. 워싱턴 대통령은 두 차례의 대통령직을 수행한 뒤 또 붙잡으려는 손들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낙향했다.
미국 헌법에는 원래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라는 조항만 있었지 똑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몇 번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조항이 없었다. 워싱턴 대통령이 4년씩 2번 만 하고 끝냈기 때문에 최대 두 번만 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그 관행을 깨뜨린 대통령이 민주당의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경제 위기를 뉴딜 정책으로 돌파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었다. 연달아 4선까지 했는데, 4선 임기 시작 후 1년여 만에 사망했다. 공화당은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대통령은 2번만 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수정헌법 조항을 덧붙이는 데 성공했다.
외국에서 볼 때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어마어마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 국내적으로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그 이유는 미국 헌법이 대통령을 상징적인 존재로만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선거로 뽑기는 하지만 왕인데, 실질적인 권한을 주면 진짜 왕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미국 대통령의 실질적 힘은 헌법이 구상한 것보다는 강화돼 왔다. 그래도 미국 대통령이 사실상 하는 일은 첫 임기 4년은 자기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 두 번째 임기 4년 동안은 자기 소속 정당이 계속 집권할 수 있도록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다. 부통령은 대통령 궐위 시 땜빵 하는 스페어타이어다. 미국 행정부의 실세는 국무장관이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적절히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려는 의지들이 국무장관을 행정부의 실세가 되도록 관행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에게 실질적인 권한이 부여되면 국가원수로서 제왕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미국이 만든 대통령제를 수입해 놓고는 그 기반인 권력분립은 무시해서 독재로 빠져서 왕을 탄생시킨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도 그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다시 하기는 싫다. 기왕에 수입해 왔다면 원래의 매뉴얼에 따라 제대로 해보든가, 아니면 폐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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