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희의 아이러니] 한국 문화의 위상과 태도

기자 2023. 4. 1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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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으로 널리 소비됨 넘어
한국이 존경받는 나라 되길 바라
그러려면 자부심은 좋지만
벼락부자의 젠체는 제발 없어야

주말에 자주 고궁에 간다. 경복궁에 가면 주변을 둘러싼 인왕산, 북악산의 산세도 건축물과 어우러져 눈을 즐겁게해 준다. 고궁은 더 이상 나이 지긋한 분들이 주로 오는 공간이 아니다. 주변 가게에서 화려한 한복을 빌려 입은 젊은이와 외국인들이 주인공이다. 한복을 입은 외국인이 전에는 신기했지만, 이제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내가 고궁을 찾는 이유 중에는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를 즐기는 모습이 기꺼운 점도 있다.

조광희 변호사

개인적인 일로 곧 출국하여 독일어권 사람들을 만날 일이 생겼다. 한국 문화에 우호적일 그 사람들과 어떤 태도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한국의 위상은 사실 오래전에 시작된 제조업의 선전과 함께 꾸준히 변하고 있었다. 그러다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대중음악이 전 세계에 전면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마침내 우리의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극적으로 뒤집었다. 내 세대는 그런 변화가 어리둥절하지만, 청년들은 세계 어디를 가도 자연스럽게 그 위상을 받아들이며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폄하도 문제지만, 지나친 자부심도 독이다. 우리의 문화적 성취는 놀랍지만, 머지않아 지나갈 유행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의 심각한 모순들을 잘 알고 있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생률이 상징하는 연대 없고, 배려 없고, 불평등한 사회를.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일지는 모르나, 여전히 답답하고 후진적인 정치를.

나는 가끔 한국의 문화적 발전과 역동성이 ‘놀라운 경제적 발전과 여전히 심각한 사회적 모순 사이의 아이러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높은 문화적 역량이 있는데, 마침 온갖 문제가 옆에 널려 있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그토록 칭찬받을 일일까.

독일어권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눌까 고민하다가, 한국이 제3세계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내가 받은 독일어권 문화의 영향을 되새겨 보았다. 나는 가끔 내 사고에 깊은 영감을 준 사람들을 몇명으로 정리해 볼 때가 있다. 석가모니에게서는 만물은 늘 변하고 영속하는 자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니체는 인간에게 금지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동의할 수 없는 지점도 많지만, 마르크스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방법론을 알려 주었다. 프로이트는 내 안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빈 출신의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직면한 거의 모든 철학적 문제는 ‘언어를 정확히 사용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된 언어적 혼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석가모니 외에는 모두 독일어권의 사상가들이다. 나는 곧 만날 사람들이 아무리 한국 문화를 칭찬해도, 내 생각을 형성한 사람들이 죄다 그들의 선배라는 현실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창한 ‘상징폭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지배계급의 문화를 피지배계급에게 부과시키는 것, 특히 이러한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지배적 문화는 합리적인 반면 자신의 문화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과정을 지칭한다. 그것은 한 사회 속에서도 작동하지만, 전 지구적으로도 행사될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할리우드가 온 세계에 행사해 온 상징폭력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양철학이 우리 인문학에 행사해온 상징폭력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 사고를 형성한 사상가가 대부분 서양인이라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지적으로 크게 빚을 지기도 했지만, 심각한 상징폭력을 거쳐 서양적 인간으로 개조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한국은 학문적으로는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상징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얻었다. 고마운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우리가 겪은 상징폭력을 성찰하며 우리가 국력이 미약한 나라들에 미칠 영향을 겸손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외형적으로는 선진국에 진입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뭘까. 벼락부자의 젠체하는 태도만큼은 없었으면 한다. ‘민족의 저력’ 어쩌고저쩌고는 자화자찬일 뿐이다. 그동안 못나서 못산 것이 아닌 것처럼, 이제 잘나서 잘사는 것도 아니다. 개인이나 민족이라는 단위에 귀속시킬 수 있는 요인은 생각보다 미미하다. 대부분은 역사적이고 구조적이다. 나는 한국이 문화적으로 널리 소비되는 나라를 넘어, 존경받을 만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은 졸부를 겨우 벗어나고 있다. 건전한 자부심은 좋지만, 나라의 부강함을 자신의 존재감으로 혼동하는 일도 없으면 좋겠다. 세상은 돌고 돌기 마련이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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