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칼럼]한미동맹 ‘복원’ 중요하지만 ‘과신’은 위험

정용관 논설실장 2023. 4. 1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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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감청 의혹에 “상당수 위조” 운운했다가
‘자기 과시’ 21세 병사 체포로 머쓱해진 용산
尹정부, 너무 미국 의식하며 조심조심하는 듯
단호할 땐 단호해야 한미동맹 더 견고해질 것
정용관 논설실장
어느 전직 외교 수장과 미국 정보기관의 감청 의혹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재미있는 영어 표현을 들었다. ‘클라이언타이티스(clientitis)’라는, 필자에겐 생소한 단어였다. 외교 당국자나 현지 주재원 등이 본분을 망각하고 클라이언트, 즉 ‘고객’인 상대국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방어하는 경향을 보일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협상 상대국 과신(過信), 의존국 과신 증후군 등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미 기밀문서 유출 사건으로 용산에 대한 감청 의혹이 불거졌을 때 우리 대통령실이 보인 대응 방식이 딱 그랬던 것 아니었나 싶다. 정작 미국은 ‘진본’이 유출됐다는 점을 인식하고 유감을 표시하며 색출 작업에 나섰는데, 무슨 연유인지 우리 대통령실은 “상당수 위조됐다는 데 한미 평가가 일치한다” “악의적 도청 정황은 없다” 등 실드 치는 데만 급급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기밀 유출의 용의자는 21세 하급 병사로 밝혀졌다. 빨간 반바지 차림으로 잔뜩 겁을 먹은 채 장갑차와 소총 등으로 중무장한 FBI 요원들에게 체포되는 모습을 보니 허탈함마저 들었다. 정부 정책에 분노한 내부 고발자도 아니고, 러시아 등 제3국의 개입도 아니고, 고작 자기 과시욕이 강한 일개 병사의 ‘철부지 일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코미디 같은 사건이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진 것도 황당하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우리 정부의 ‘조심조심’ 대응 방식이다. 용산에 대한 감청이 실제 이뤄졌는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등에 대한 테크니컬한 측면의 진상 규명도 중요하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번 사건을 다루는 현 정부의 위기관리 역량, 동맹의 가치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동아일보 창간 여론조사에서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호감도’가 84%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87%, ‘한미 연합훈련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88.8%에 달했다. “반미면 어때” 했던 말이 먹히던 시절이 불과 20년 전 일이니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 지난 정부의 친중 노선에 대한 반작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 바탕엔 높아진 국가 위상에 대한 자존감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이번 사건에서 친미-반미의 진영에 얽매이지 않은 보통의 국민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깊은 논의가 오가는 우리나라 최고의 권부(權府)가 진짜 뚫렸는지, 방어 태세에 허점은 없는지, 중국이나 러시아 등에도 뚫리고 있는 건 아닌지 등을 걱정했다. “용산 이전 때문”이라는 식의 정치 공세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우려다. 정보전의 세계, 다른 나라도 우리나라도 다 하는 활동임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문제가 드러난 이상 응분의 해명과 조치를 요구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정상회담 불똥만 의식한 듯 “사과 요구 않겠다” 등의 반응만 나오니 의아했던 것이다.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해 훼손됐던 동맹 복원의 기틀을 잡고 또 다른 미래를 열어가는 것은 중차대한 과제다. 그러나 지나친 동맹 의존이나 동맹 과신의 심리나 태도는 독(毒)이 될 수도 있는 만큼 경계해야 한다. 70년 전 “강대국은 믿어선 안 된다”고 했던 이는 다름 아닌 이승만 전 대통령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듬해인 1954년 미국을 방문한 그는 환영 행사에서 휴전에 대해 “미국이 겁을 먹어서”라고 일갈한 데 이어 의회 연설에서도 “나약하다는 것은 노예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등 미국을 대놓고 질타했다. 당시 국제 정세에 맞는 발언인지 여부를 떠나 적어도 결기는 있었다.

바야흐로 천하 양분의 시대라고 한다. 미국도 중국도 전 세계를 상대로 줄 세우기 압박에 나서고 있다. 고난도 외교일수록 당당함이 깔려 있어야 한다. 이번 건만 해도 미국 당국자들이 먼저 굉장히 곤혹스러워하고 미안해해서 “고맙다”고 했다는 식으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밥 먹을 때 매너’와 ‘공식 석상의 매너’는 달라야 한다. 한미 동맹의 본질적 가치, 상호 신뢰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단호히 하는 모습을 보일 때 동맹도 더 견고해진다. 곧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다. 국빈이란 형식이 아니라 국익을 깐깐히, 또 담대하게 챙기는 모습을 보일 때 흔들리는 지지율도 반등할 수 있다. 그래서 궁금하다. 대체 어느 단계에서 “상당수 위조” “한미 견해 일치” 등의 정부 메시지를 정했던 건지…. 흐지부지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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