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쌓여가는 미개봉작… ‘투자 가뭄’ 악순환에 한국영화 운다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 개봉 40여 일만인 지난 15일 누적 관객수 446만 명을 넘어서며 국내 개봉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1위 ‘더퍼스트 슬램덩크’(446만4094명)를 뛰어넘었다. 지난 12일 개봉한 ‘존 윅4’는 마니아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나흘째 박스오피스 1위. 해외 영화의 선전에 극장은 모처럼 활기를 띠지만, 한국 영화산업은 웃지 못하고 있다. 방학과 맞물린 연초 성수기 주도권을 해외 영화에 뺏긴 데다 올해 전망도 밝지 못해서다. 지난 10일 만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박기용 위원장은 “코로나19가 야기한 한국 영화산업의 위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팬데믹을 거치는 동안 한국 영화산업은 OTT 플랫폼이란 거대한 변수를 만나 예상보다 빠르게 변화의 파도와 맞닥뜨렸다. 여기에 평균 1만 원이 넘는 영화 관람료는 관객의 신중함과 대체재 모색 성향을 키웠다. 이 같은 상황은 전반적인 한국 영화계 위기로 이어진다. 한국 영화의 진흥을 담당하는 영진위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올해 창립 50주년, 부산 이전 10주년을 맞은 영진위는 향후 50년 한국 영화산업 설계를 위한 갈림길에 섰다. 국제신문은 두 차례에 걸쳐 영진위의 대응 전략을 살펴본다.
- 1인당 관람횟수 가장 많던 한국
- 코로나·OTT 흥행 겹악재 맞아
- 작년 2.19회 그쳐 세계 6위 기록
- 영화 한 편 제작 통상 50억 들어
- 개봉 밀리면서 비용 회수 어려움
- 신작 투자까지 막히는 상황 초래
- 부산 이전 10주년 맞은 영진위
- OTT에 기금 징수 등 활로 모색
▮ 한국인 극장 발길 ‘뚝’
한국 영화산업의 위축은 비대면 문화가 야기한 OTT 플랫폼의 성장과 연관이 깊다. 영진위가 지난 10일 발간한 ‘2022년 한국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영화·영상 시장 규모는 ▷극장 49조1292억 원 ▷OTT 94조2799억 원 ▷DVD·블루레이 10조7327억 원이다. OTT 규모는 전체의 절반이 넘는 61.2%를 차지하며, 극장 시장의 두 배에 달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영화 관람료 인상은 한국 관객의 신중함을 증폭시켰다. 멀티플렉스 주말 관람료는 1만5000원이다. 4인 가족이 팝콘과 음료를 즐기며 영화를 보려면 10만 원 가까이 든다.
OTT 플랫폼에서 웬만한 영화와 시리즈를 거의 볼 수 있는 데다 관람료가 비싸니 관객은 ‘엄선’해 영화관을 찾는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이전인 2019년 한국인 1인당 영화 관람횟수는 4.4회로 세계 1위였다. 4년 만인 지난해에는 2.19회(6위)에 그쳐, 절반이 뚝 떨어져나간 것이다.
“극장에 볼 영화가 없어도 심심한 관객은 없다.” 영진위는 결산 보고서를 통해 팬데믹 이후 달라진 극장의 위상을 이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 쌓인 창고영화 ‘악순환’ 시작
제작을 완료했지만 개봉하지 못한 ‘창고 영화’는 쌓여만 갔다. 영진위가 발표한 ‘한국영화연감’에서 연간 제작된 영화와 개봉된 영화의 수치를 확인할 수 있다. 연감에 따르면 ▷2019년 609편 제작/502편 개봉 ▷2020년 807편/615편 ▷2021년 804편/653편 ▷지난해 817편/703편으로, 연간 50~100편의 창고 영화는 팬데믹 이후 연간 200편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쌓인 창고 영화가 개봉하더라도 현재 트렌드와 관객 수준을 만족시킬지 미지수란 점도 난제다. 이미 제작에 투입된 자금도 문제다. 상업영화 1편에 제작비로 통상 50억 원이 쓰이고, 여기에는 투자사·제작사·감독·출연진·배급사 등 다양한 산업이 촘촘히 묶여 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을 못하니 투자금은 회수되지 못 하고, 회수된 자금이 흐르지 않으니 신작 영화에 투입할 투자금이 막히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해외 영화의 선전과 창고 영화의 증가로 한국 영화산업 회복은 더딘 편이다. 영진위의 ‘2월 한국영화 산업 결산 발표’를 보면 지난달 한국영화 매출액은 134억 원으로 2019년 2월의 9.2% 수준에 그쳤다. 지난 2월 한국영화 관객 수는 127만 명으로 2019년 2월의 7.4% 수준이다. 지난해 12월 14일 개봉한 ‘아바타:물의 길’이 보름여 만에 900억 원을 벌어들인 것과 대조적이다. 관람객의 신중한 선택으로 ‘영화 양극화’ 현상도 한동안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 영진위의 돌파구는
영진위는 ‘예산 확보’와 ‘영화 개념의 재정의’ ‘인재 양성’ 등 크게 세 가지 방안으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전략이다. 현재 한국 영화산업은 영진위 자력으로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우선 영화발전기금이 올 연말이면 고갈돼 영화산업 육성 지원에 쓰일 재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영화관 입장권 수입의 3%가 주요 재원이었던 영화발전기금은 관객 감소 등 악재를 만나 급감했다.
영화인이 만들고 제작했으나 영화로 분류되지 않는 ‘OTT 작품’에 대해서도 더 깊이 고민할 시점이다. 영진위 박기용 위원장은 “요즘은 비디오란 말을 쓰지 않는다. 영화 개념을 시대에 맞게 재정의해야 한다”며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OTT 작품에 영화발전기금을 부과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박 위원장은 “이미 프랑스 캐나다 등은 OTT에서 기금을 징수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현실화하기에는 법적 근거를 먼저 만들어야 하고 이에 따른 선행 절차가 많다. 달라진 흐름을 포착하고 이를 어떻게 현 상황에 맞게 반영할 건지 논의의 장을 꾸준히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 영화산업 미래를 위한 인재 육성 역시 협업 범위를 넓힌다. 박 위원장은 넷플릭스 코리아 등과 인재 양성을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수한 필름메이커 확보는 장기적 영화산업 발전을 위해 필수”라며 “협력과 공생을 핵심 주제로 내걸고 국내외 교육기관과 OTT 플랫폼 등과 머리를 맞댈 것”이라고 강조했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