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16] 저녁 식사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3. 4. 17.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저녁식사

교도소로 가야 합니다

남자에게 통역하고 법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

백화점에 들려 가다랑어 다타키를 사서

전철에 뛰어올라 좁은 자리에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오늘 맡은 사람은 생각보다 담담했나

(…)집에 들어와 바로 쌀을 씻는다

반성하고 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남자의 말들이 질끔질끔 쌀뜨물을 타고

흘러 내려간다(…)

갓 지은 흰쌀밥의 고소한 김을 맡고(…)

교도소로 가야 합니다

남자에게 통역한 말 따위는

차가운 맥주를 목 뒤로 넘기면서

완벽하게 잊은 것처럼 들이켰다

-정해옥(丁海玉 1960~)

(손유리 옮김)

/일러스트=김성규

정해옥은 일본의 가나가와 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 시인이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80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역사를 공부하며 언어 문제로 고민하다 시를 쓰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30년 동안 오사카의 법정에서 한국인 피고인들의 통역사로 일했다.

‘저녁식사’에는 ‘법정 통역인(法廷通譯人)’으로 활동하다 집에 돌아와 밥을 지어 먹는 그의 일상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한국과 일본, 두 개의 언어를 이어주는 일을 해온 그 정성, 조국을 잊지 않는 마음이 애틋하다.

“남자에게 통역한 말 따위는 완벽하게 잊은 것처럼”이라고 썼지만, 잊지 않았기에 그의 마음에 남은 앙금을 시로 꺼내 보여준 게 아닌가.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