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박근혜의 증세, 노무현의 FTA, 윤석열의?
지난달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열리던 날, 서울 서대문 인근의 한 식당. 김기현 당대표의 당선 뉴스를 보던 한 시민이 이렇게 툭 내뱉었다. “허허, 중국 공산당 대회 같네.”
나이 지긋한 그 시민이 보수 지지자였는지 진보 지지자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말을 듣고 다시 TV 화면을 바라보니 김 대표가 아닌 중국 어느 정치인으로 인물을 바꾼다면 그의 말도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 혼자 피식 웃음이 났다.
개인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업적(?) 중 하나는 빨강을 정치에 돌려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드’는 한국 정치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색이었다. 공산당이 연상되다보니 소수 진보정당을 제외하고는 감히 쓸 수 없는 색깔이었다. 국민의힘은 민정당 때부터 파랑을 고수했고, 민주당은 녹색과 노랑을 써왔다. 2012년 새누리당이 빨강을 채택하자 당내외에서 격론이 벌어졌지만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의 뜻은 확고했다. 친박계는 “빨강은 열정을 상징한다”며 보수여론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불만은 여전했지만 박근혜의 결정이니 보수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정치가 아니 한국 사회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결정적 장면이었다.
18대 대선에서 승리하고 들어선 박근혜 정부에서 기억나는 정책적 성과는 증세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로 정권 출범부터 세수 부족에 시달리자 2013년 박근혜 정부는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며 소득세를 증세했다. 최근 만난 박근혜 정부 관계자는 “증세가 아니라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강조하지만 표현이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증세였다. 여론의 반발에 정부는 열흘 만에 소득세법 개정안을 다시 내야 했다. 중산층의 세부담은 완화시켜줬지만 고소득층의 세부담은 그대로였다. 이어 담뱃세를 인상했다. 임대소득과세, 금융소득과세의 틀도 이 시기에 구체화됐다.
당시 국세청도 종합소득세나 법인세를 걷을 때 매우 깐깐해졌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감세를 기대했던 보수 지지층으로서는 불만이 적지 않았겠지만 자신들이 지지하는 박근혜 정부의 결정이었다. 정권 후반부로 가면서 곳간이 채워지기 시작했고, 이는 2019년 전대미문의 코로나19가 닥쳤을 때는 문재인 정부가 쓸 수 있는 재원이 됐다.
참여정부도 지지자들의 반대를 설득하며 중요한 정책을 많이 추진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지지자들의 이탈과 지지율 폭락을 가져왔지만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장고를 거듭하며 협상을 이어나갔다. 농민운동가 출신인 박홍수 의원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해 반발하는 농민들을 설득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30개월 연령 미만의 뼈 없는 살코기만 수입을 허용하는 등 세심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100년 만의 개혁이라 불리던 항만노조 상용화도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뤄낸 성과였다. 항만 인력을 항운노조가 공급하는 것이 아닌 하역회사가 뽑는 것으로 바꾸면서 매년 전국의 물류가 멈춰 섰던 항만노조발 물류대란은 사라졌다. 부안사태를 불러왔던 중저준위 방폐장 건설도 빼놓을 수 없다. 시민사회단체의 큰 반발이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대안을 마련하면서 19년간 멈춰 있던 국가적 과제를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경주에서 열린 착공식에서 노 전 대통령이 “경주시민 여러분 기쁘시지요? … 걱정도 좀 있지요?”라고 묻던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다음달이면 윤석열 정부가 출범 1주년을 맞는다. 그간 윤석열 정부가 추진해온 주요 정책들을 돌아보면 대개 지지자들을 향해 있다. 첫번째 세법개정안은 고소득자·고자산가의 대규모 감세안이었다. 노동시간은 69시간으로 확대하고, 검찰 인맥을 요직에 배치하면서 검찰의 힘을 빼려던 ‘검수완박’의 취지는 무력화됐다. 지지자들을 설득해야 하는 어렵고 까칠한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적 난제 중에는 보수정부가 풀어야 잘하는 것들이 있고, 진보정부가 풀어야 잘하는 것들이 있다. 국민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야당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지지세력부터 설득해야 한다. 지금처럼 집토끼를 위한 정책만으로는 국민적 공감대를 얻기 힘들다. 당장 국민연금 개혁이나 고준위 방폐장 건설 등의 과제가 닥쳤는데 윤석열 정부는 해결할 힘이 있을까. 국정운영의 큰 변화가 없다면 개인적인 의견은 부정적이다.
박병률 경제부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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