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무엇이 ‘애국’을 부끄럽게 하는가

김신영 국제부장 2023. 4. 17.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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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우월주의 내세운 미 극우는 스스로를 애국자라 부른다
중·러 독재자도 애국을 내세운다
한국은 우파·좌파 제각각 애국을 입맛대로 변용해 쓴다
공동체의 미래를 고민하는 애국, 그 본래 가치는 어디로 갔나
미국 국방부 기밀문서 유출 사건 용의자 잭 테세이라. /잭 테세이라 SNS

미국에서 연수하던 5년 전쯤 야구장에 종종 갔다. 경기 시작 전 국가(國歌)가 연주되면 관객은 모두 일어선다. 깜박하고 모자를 안 벗으면 “모자 벗어야지!”라고 소리치는 이들이 꼭 있었다. 경기 중반쯤엔 참전 용사가 필드에 나와 인사를 하고 모두 기립 박수를 친다. 평소엔 제멋대로인 미국인들이 ‘애국’이란 가치 앞에선 참 잘도 뭉친다 싶었다. 적어도 그때까진 그랬다.

지금 미국에서 애국이란 단어는 그 원래 뜻에서 한참 벗어나 사용된다. 한국에서 ‘민주화’나 ‘태극기’가 본래 의미를 거의 잃고 정파적으로 쓰이는 것과 비슷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하는 극단적 보수주의 세력은 반복해서 자신을 ‘애국자’라고 지칭하면서 극우를 대표하는 단어로 애국을 변질시키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는 때때로 극우 신당의 창당을 도모하는데 가장 유력한 당명 후보가 ‘애국당’이다.

지난 한 주 글로벌 사회는 미 정보기관의 기밀문서 유출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을 도청했다는 내용 등을 담은 문서가 온라인에 돌며 파문이 일었다. 정작 용의자를 체포하고 보니 철없는 21세 말단 병사 잭 테세이라였다. 10대 친구들은 미 언론에 그를 “매우 애국적인 사람이었다”고 묘사했다. 테세이라는 평소 인종차별적, 반유대주의적, 백인우월주의적 발언을 즐겨 쓰고 ‘나는 미국을 사랑한다’면서 총 쏘기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런 행동을 통틀어 ‘애국적’이라고 일컫는 사회가 지금의 미국이다. 백인우월주의를 무게중심으로 삼는 ‘자칭 애국자’들의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사상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미 독립선언서)로 대표되는 미국이란 국가의 본질을 정면으로 배신한다.

극우가 납치하다시피 한 ‘애국’에 대한 미국인의 염증을 보여주는 설문 결과가 얼마 전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 설문에서 ‘애국심이 중요하다’는 응답이 38%에 그쳤다. 1998년 같은 질문에 70%가 애국심을 중요한 가치로 꼽았는데 반 토막이 났다. 뉴욕타임스는 “애국이란 원래 여러 결점에도 자신이 속한 국가가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하지만 요즘의 애국은 본래의 뜻을 벗어나 내가 인정하는 부분은 사랑하고, 나머지는 전부 증오하는 이분법으로 고착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애국의 오염은 미국에만 그치지 않는다. ‘셀프 3연임’을 달성해 사실상 독재자가 된 시진핑 국가주석이 가장 즐겨 쓰는 단어 중 하나가 애국이다. 중국 지도부는 내국인 결속을 위해 미국·일본·유럽 등을 적으로 설정하고 적나라한 ‘피해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를 ‘애국 교육’이라고 부른다. 우크라이나와 벌이는 전쟁이 장기화하며 국민들의 회의가 커지는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는 원래 러시아 땅’이라는 교육을 모든 교실에 도입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국제법을 무시한 제멋대로의 왜곡을 푸틴 대통령은 ‘애국 교육’이라 부른다. 가디언은 “애국은 숨길 일이 많은 정권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했다.

한국은 어떤가. 우파와 좌파 모두 애국을 입맛대로 가져다 쓴다.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사를 일삼는 극우 계열의 한 목사는 ‘애국 보수’를 내세운다. 강연 시리즈 이름이 ‘애국 강연’이다. 다른 한편에서 좌파는 맹목적 반일을 애국으로 설정한다. (한·미·일 연합 훈련으로)“자위대의 군홧발이 다시 한반도를 더럽힐 수 있다”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 같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최근 발언이 대표적이다. 이 대표의 강성 지지층 ‘개딸’이 모인 온라인 카페에선 맘에 안 드는 정치인에게 문자 폭탄을 돌리거나 반윤(尹) 정치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애국하러 간다’는 말로 표현한다. 민주당 내부에서 자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과격한 행동을 일삼으면서, 스스로는 이를 애국이라 믿는 모양이다.

2017년에 민주주의의 쇠락을 우려한 책 ‘폭정’을 쓴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얼마 전 관련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 올렸다. 책에서 우려한 일이 몇 년 사이 거의 현실이 되었다면서, 지금의 상황에 맞는 제언을 하려고 카메라 앞에 섰다고 했다. ‘애국자가 되라’는 제목의 19장에 대해 그는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구별해야 한다”며 설명을 시작한다. “국가주의는 무슨 짓을 벌이든 자신이 속한 국가와 집단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 반면 애국주의는 국가의 가치를 설정하고 그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국가주의가 현재에 안주한다면 애국주의는 미래를 향한다.” 애국주의는 국가주의보다 고귀하고 멋진 가치여야 한다는 뜻이다. “너 혹시 애국하냐”는 질문이 모욕으로 들린다면, 그 사회가 어딘가 병들었다는 뜻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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