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규의한·미동맹사] 6·25전쟁 중 한·미 정상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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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1월 제3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가 민주당의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에 압승을 거둔다.
1954년 7월 이 대통령은 미국을 국빈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했다.
1960년 6월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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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조기 종결을 약속한 아이젠하워는 당선인 신분으로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휴전에 반대하는 이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만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는 중앙청(현 광화문 자리)에서 개최된 환영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 대통령과의 공식적 만남도 취소했다.
다음 날 아이젠하워는 오후 6시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육군참모총장인 백선엽 장군이 미군 수뇌부를 설득하여 우여곡절 끝에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과 아이젠하워의 첫 한·미 정상급 만남이 간신히 성사되었다.
당시 아이젠하워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중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미 제3사단 30연대 1대대장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아들에게 “네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일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절대로 적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마라. 네가 포로로 잡히면 나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일화가 있다.
1953년 1월20일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54년 7월 이 대통령은 미국을 국빈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했다. 1960년 6월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78년 만에 이뤄진 미국 대통령의 첫 공식 방한이었다.
최완규 육사 외래교수·경제사회연구원 국방센터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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