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규의한·미동맹사] 6·25전쟁 중 한·미 정상의 첫 만남

2023. 4. 1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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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1월 제3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가 민주당의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에 압승을 거둔다.

1954년 7월 이 대통령은 미국을 국빈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했다.

1960년 6월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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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1월 제3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가 민주당의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에 압승을 거둔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52년 12월2일, 한국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취임 전이라도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공약한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방한했다. 1882년 한·미가 수교한 이래 70년 만에 미국의 최고위급 인사의 한국 방문이었다.
1952년 12월4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경무대에서 만난 이승만 대통령. 국가기록원 제공
아이젠하워는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 후 곧장 동숭동(옛 서울대 문리대 건물)에 있는 미8군 사령부로 이동하여 사흘 동안의 방한 기간 체류했다. 12월3일 이승만 대통령은 광릉을 방문 중인 아이젠하워 당선인을 찾아가 태극기를 선물하고 같은 날 오후 개최 예정인 정부 공식 환영 행사 계획을 알렸다.

한국전쟁 조기 종결을 약속한 아이젠하워는 당선인 신분으로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휴전에 반대하는 이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만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는 중앙청(현 광화문 자리)에서 개최된 환영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 대통령과의 공식적 만남도 취소했다.

다음 날 아이젠하워는 오후 6시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육군참모총장인 백선엽 장군이 미군 수뇌부를 설득하여 우여곡절 끝에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과 아이젠하워의 첫 한·미 정상급 만남이 간신히 성사되었다.

당시 아이젠하워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중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미 제3사단 30연대 1대대장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아들에게 “네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일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절대로 적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마라. 네가 포로로 잡히면 나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일화가 있다.

1953년 1월20일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54년 7월 이 대통령은 미국을 국빈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했다. 1960년 6월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78년 만에 이뤄진 미국 대통령의 첫 공식 방한이었다.

최완규 육사 외래교수·경제사회연구원 국방센터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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