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통학로 터준 건물주

이명희 기자 2023. 4. 16.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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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초등학교 인근 상가건물 사이로 학생들을 위한 통로가 나 있다. 이 통로는 이 상가 건물주가 임대 수익을 포기하고 동네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해 내준 통학로이다. 연합뉴스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지난 8일 음주 차량에 치여 숨진 배승아양이 떠난 자리엔 분노가 들끓었다. 화난 어른들은 스쿨존에 과속방지턱이나 안전펜스를 설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 분노가 누그러질 무렵 실은 사고 구역에 설치된 과속방지턱이 ‘교통 불편을 초래한다’는 어른들 민원으로 일주일 만에 철거됐다는 웃지 못할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른들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 어린이 안전이 어른편의를 위해 또 한 번 무너진 것이다.

모든 어른들이 그렇지는 않다. 동네 초등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임대 수익을 포기하고 건물 한가운데를 뚫어 통학로를 내준 건물주 사연이 훈훈한 화제가 됐다. 아이들에게 손 내민 이들은 전북 전주시 인후동에서 과일가게를 하는 박주현·김지연씨 부부이다.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가 혼재된 이 지역은 어린이 보행 교통사고가 잦은 곳이라고 한다. 박씨는 주차장이던 땅에 상가를 올리면서 건물 한가운데를 뚫어 보행로를 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주변에 쇠파이프를 둘러 뒀는데, 하루에만 아이 200∼300명이 쇠파이프 아래로 기어 이 땅을 지나갔다. 여기를 막아 상가를 세워버리면 아이들은 어떡하나 고민하다 길을 냈다”고 했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지 않은 것은 아닐 터다. 통학로로 내준 땅 면적은 99㎡다. 임대를 놓아도 월 100만원, 1년 기준으로는 1200만원이다. 하지만 부부는 동네 아이들이 안전해지는 길을 택했다.

아이들은 매일 이 길을 지난다. 과일가게와 생선가게 사이 통로에는 ‘인후초등학교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반대로 하굣길엔 ‘집에 가는 길’이라는 팻말을 따라 다시 이 통로를 지나간다. 이 길 덕분에 아이들은 사고 다발 지점 여러 곳을 피해 학교를 오갈 수 있다. 부부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이들 가게 매상을 올려주는 ‘돈쭐내기’에 나선 전주 시민들도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선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돌아보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씩 늘어난다. 온 나라를 덮친 아픔을 딛고 다시 맞는 아홉 번째 봄, 세월호와 이태원 핼러윈 참사를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답할 차례다. 돈보다 생명이, 돈보다 안전이 소중하다고.

이명희 논설위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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