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통학로 터준 건물주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지난 8일 음주 차량에 치여 숨진 배승아양이 떠난 자리엔 분노가 들끓었다. 화난 어른들은 스쿨존에 과속방지턱이나 안전펜스를 설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 분노가 누그러질 무렵 실은 사고 구역에 설치된 과속방지턱이 ‘교통 불편을 초래한다’는 어른들 민원으로 일주일 만에 철거됐다는 웃지 못할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른들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 어린이 안전이 어른편의를 위해 또 한 번 무너진 것이다.
모든 어른들이 그렇지는 않다. 동네 초등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임대 수익을 포기하고 건물 한가운데를 뚫어 통학로를 내준 건물주 사연이 훈훈한 화제가 됐다. 아이들에게 손 내민 이들은 전북 전주시 인후동에서 과일가게를 하는 박주현·김지연씨 부부이다.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가 혼재된 이 지역은 어린이 보행 교통사고가 잦은 곳이라고 한다. 박씨는 주차장이던 땅에 상가를 올리면서 건물 한가운데를 뚫어 보행로를 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주변에 쇠파이프를 둘러 뒀는데, 하루에만 아이 200∼300명이 쇠파이프 아래로 기어 이 땅을 지나갔다. 여기를 막아 상가를 세워버리면 아이들은 어떡하나 고민하다 길을 냈다”고 했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지 않은 것은 아닐 터다. 통학로로 내준 땅 면적은 99㎡다. 임대를 놓아도 월 100만원, 1년 기준으로는 1200만원이다. 하지만 부부는 동네 아이들이 안전해지는 길을 택했다.
아이들은 매일 이 길을 지난다. 과일가게와 생선가게 사이 통로에는 ‘인후초등학교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반대로 하굣길엔 ‘집에 가는 길’이라는 팻말을 따라 다시 이 통로를 지나간다. 이 길 덕분에 아이들은 사고 다발 지점 여러 곳을 피해 학교를 오갈 수 있다. 부부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이들 가게 매상을 올려주는 ‘돈쭐내기’에 나선 전주 시민들도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선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돌아보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씩 늘어난다. 온 나라를 덮친 아픔을 딛고 다시 맞는 아홉 번째 봄, 세월호와 이태원 핼러윈 참사를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답할 차례다. 돈보다 생명이, 돈보다 안전이 소중하다고.
이명희 논설위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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