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해법은 가진 자가 과도한 혜택 내려놓는 것이죠”
<증오를 품은 이를 위한 변명>(성균관대 출판부).
엄한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가 ‘증오의 사회학, 그 첫 번째’라는 부제를 달아 최근 낸 책이다.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북아프리카 이슬람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2001년 9·11테러 이후 전 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다른 인종과 민족, 종교 사이의 증오 현상’을 들여다본 책이다. 내년에는 한국 사회의 증오 문제에 초점을 둔 후속편을 낼 계획이다.
엄 교수를 지난 11일 강원 춘천시 한림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2011년부터 4년간 춘천시민연대 공동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그동안 <프랑스의 이민문제>, <이슬람주의>, <다문화사회론> 등의 책을 냈다.
이슬람과 이주민 전문 연구자인 그는 이슬람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태동한 2014년부터 증오 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단다. “이슬람국가가 극단적 행태를 보이는 그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여성혐오 현상이 심각해지고 미국 역시 트럼프 집권기에 이주민, 흑인,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가 심해지는 등 증오 현상이 새 국면에 진입한 것 같아 이런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명하고 싶었죠.”
그는 책에서 모두 9개 장으로 나눠 증오의 기원과 대상 그리고 해법까지 에세이 형식으로 논의를 펼쳤다.
저자에 따르면 전 세계 증오 현상의 바닥에 깔린 인종주의나 동성애 담론 등은 모두 근대 이후 서구의 산물이다. 외모로 인간의 우열을 논하는 ‘과학적’ 인종주의가 등장한 게 19세기 중엽이었고, 동성애라는 개념은 1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단다. 그가 “증오는 위에서 왔고 사회 문제”라고 단언하는 이유이다.
이 때문에 증오 해법을 찾으려면 증오하는 이들의 ‘얼굴’을 봐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증오는 자신들 몫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하는 ‘못 가진 사람들’을 향한 감정이기에 증오하는 개인을 악마화해선 답을 찾기 힘들어요.”
그는 이어 “많은 사람이 증오를 수평적인 문제라고 보고 증오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사람들 사이 다름을 인정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증오는 수직 관계의 문제”라고도 했다. “증오 밑에는 권력과 계급의 문제가 있어요. 이주민이나 젠더 갈등 그리고 장애인 문제까지 모두 그간 가진 자가 누려온 과도하고 부당한 혜택을 버리지 않는 한 해결하기 힘들어요. 그런 혜택이나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선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낭만적이고 순진한 생각이죠.”
그는 세계적인 증오 확산 배경에는 “백인이나 남성과 같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집단들 상황이 악화한 것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진단했다. “주류 백인 노동자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과거의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데다 사회구조나 정부정책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이 떨어지면서 이주민이나 여성, 흑인들에게 분풀이하는 거죠. 예전에는 노동자가 (비주류 이주민에 대해) 관용과 포용을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관용의 주체가 이주민과 일상이 겹치지 않는 고학력 중산층과 상류층으로 바뀌었어요. 그들은 쉬운 관용을 말하죠.”
2014년 ‘이슬람국가’ 태동 이후
세계 만연하는 증오현상 연구
최근 ‘증오의 사회학’ 첫 권 내
내년엔 한국 사회 초점 후속편
“한국 증오현상 특징은 빠른 속도
조급하게 답 찾으려 해선 안 돼
이주민 한국 사회 기여 부각을”
그는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1990년대만 해도 이 나라의 이슬람 등 비주류 이주민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나 어느 순간 절망으로 바뀌었다고 책에 썼다. “1992년 프랑스에 처음 가 보니 이주민 사회통합과 이주민을 위한 사회운동이 비중 있는 관심사였어요. 한국의 민주화운동처럼요. 그런데 9·11테러와 아프간,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이슬람 난민이 급증하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었죠. 유럽 국가들이 이 난민들을 보호해야 할 부담스러운 존재로만 여기면서 자국이 필요해 과거 받아들였던 기존 이주민들까지 덤터기로 눈총을 받게 되었죠. 이제는 이들 나라에서 이주민 권익 옹호를 위한 연대 운동도 어려운 상태이죠.”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의 가장 큰 특징은 변화의 속도이죠.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가 여기서도 보입니다. 우리는 지난 20~30년 매우 큰 변화가 있었어요. 여성이나 이주민, 다른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부정적인 인식이 나타나면서 페미니즘이나 다문화주의가 그 차별을 많이 교정했어요. 하지만 2010년대 중반 들어 남성, 내국인 토박이들이 자신들이 누리던 혜택이 사라진 것에 불만을 품고 반발했고 이어 여성과 다른 소수자들이 역반발했죠. 젠더 갈등이 격렬한 것도 이런 속도 때문이죠.”
하지만 그는 한국의 증오 현상은 유럽 여러 국가에 비하면 ‘통제 가능한 수준’이라고 했다.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를 보면 극우파가 선거에서 20% 이상 득표합니다. 여기선 정치인 등의 혐오 발언이 우리보다 훨씬 심해요. 이주민이나 집시와 같은 소수자에 대해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불편해졌다’고 대놓고 말하죠. 중동 대부분 국가에서는 여성을 함부로 대하고요. 미국도 증오 현상이 두드러지는데요. 여기에는 라틴계가 인구 구성에서 백인을 위협하고 여성과 흑인들이 더는 백인 남성의 지배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점 등이 작용했죠. 하지만 우리는 증오를 낳는 상당한 구조적 요인들이 있지만 아직은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선을 넘어선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요. 민주화운동 유산이 남아 있고 평등 관념이 헤게모니(주도권)를 쥐고 있는 영향도 있을 겁니다.”
작년 말 국내 체류 이주민은 220만 명을 넘었다. 서구의 경험에서 ‘이주민과 선주민이 좋은 이웃이 되는 길’을 배울 수 있을까 묻자 그는 ‘혼합 접근법’과 ‘상호문화주의’를 말했다. 모두 프랑스에서 직접 겪은 정책이다.
“프랑스는 사회주택을 만들어 이주민과 선주민이 섞여 살고 교육도 함께 받도록 했어요. 상호문화주의는 이주민 문화를 선주민 문화와 동등하게 인정하고 두 문화가 만나 함께 변화해 제3의 길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죠. 이주민을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일 때 증오를 막을 수 있어요.” 그는 “이주민과 내국인이 같은 시민과 계급으로 연대 운동을 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덧붙였다. “이주민의 다름을 인정하자는 다문화주의를 넘어 이주민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점을 적극 부각할 필요가 있어요. 사실 우리 산업이 유지되는 게 그들 때문이잖아요. 우리가 이주민 덕을 보고 있는 거죠. 우리가 원하지 않은 데 그들이 온 게 아니죠. 지방대도 외국 학생이 없으면 유지가 어려워요.”
그는 증오 현상에 대해 조급하게 답을 찾으려고 해선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지금 20대만 해도 다문화 가족도 접하고 관련 교육도 받았지만 기성 세대는 다릅니다. 그들이 낯선 복장의 이주민이 낯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워요. 그들의 일상을 뒤흔드는 낯선 사람들을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한다는 점을 설득해야죠.”
그는 증오범죄 규정이나 차별금지법, 혐오표현금지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도 교통사고를 막기 위한 법규처럼 증오 확산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증오범죄를 처벌하거나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제도가 없으면 자칫 ‘한풀이해도 된다’는 생각을 부추겨 그동안 쌓아온 성과마저 무너질 수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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