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철의 까칠하게 세상읽기] 미국의 도청면허 인정하는 여·야

2023. 4. 1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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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철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할리우드 영화 007시리즈를 보면 영국 첩보기관 MI6의 요원 제임스 본드는 살인면허를 갖고 있다. 살인과 같은 중범죄를 저질러도 책임을 면해주는 것이다. 1989년 제작된 007 영화는 아예 타이틀을 '007 살인면허'(Licence to Kill)로 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영화 제목에는 대영제국을 그리워하는 영국인들의 자부심과 오만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첩보 활동을 하든, 대테러 업무를 하든 해당 국가의 실정법을 위배하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한다. 누구든 예외는 없다. 그게 국제사회의 규칙이고 주권국가로서의 마땅한 대응이다.

최근 미국 국방부 기밀문서 유출 사건은 21살의 매사추세츠주 주방위군 일병의 우발적 범죄로 마무리되고 있다.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정보력을 과시하기 위해 비밀문서를 올렸다는 설명이다.

그가 어떠한 과정으로 정보를 취득하고, 어떻게 공유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그동안 혈맹, 우방이라고 부르는 한국의 대통령실 대화를 도청했다는 사실이다. 유출된 기밀문서는 전화 등의 신호정보(시긴트·Sigint)를 활용하여 한국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의 대화를 낚아챘다고 적혀있다.

문서 속의 김성한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미국의 포탄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를 했다. 미국의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제공해서 러시아를 자극할 수도 없다는 고위 정책 결정권자들의 고심이었다.

중대사안인 도·감청에 우리 정부의 대응은 소극적이다. 첩보원들의 세계에서 도·감청은 일상화되어 있다고 남의 나라 이야기하듯 말한다. "위조된 내용이 많다", "악의를 가지고 했다는 정황은 없다"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말에는 말문이 막힌다.

도둑을 맞았으면 일단 화부터 내는게 정상이다. 그런데 도둑의 입장을 먼저 걱정해주는 격이다. 또 우리만이 아니라 영국과 캐나다, 이스라엘, 우크라이나 등에서도 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설명도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이번에 공개된 내용만이 도청됐을 리 없다. 공개된 내용은 2월 28일과 3월 1일 겨우 이틀치 정보다. 얼마나 더 중요한 내용이 미국에, 또 다른 나라 첩보기관에 흘러갔는 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당장 대통령의 집무실 대화나 대통령 관저 대화는 도·감청에서 자유로운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 또 다음 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의 핵심의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 논의가 노출된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미국은 우리의 패를 미리 알고 고스톱을 치는 격이다. 손자병법의 말을 빌자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상황에 미국이 있는 것이다.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실 도청에 단호한 대처를 요구하면서도 강조점은 대통령실 이전에 두고 있다. 즉, 윤석열 정부가 성급하게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도청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는 지적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민주당에서 (이번 사건이) 동맹 신뢰를 깨고 한국의 주권 침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윤석열 정부를 공격하는 국내 정치용 과시 화법"에 불과하다.

필자는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이전했기에 더 쉽게 도청당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동안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청와대 역시 각국 첩보전의 무대였다. 오랫동안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한 만큼 도·감청 시설은 청와대 주변에 더 많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미국이 세계 각국에서 얼마나 면밀하게 첩보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사람을 접촉하는 전통적인 휴민트(Humint) 뿐만 아니라 인공위성 등을 첨단기술을 활용하는 테킨트(Techint)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올해 초 미국 정부와 유럽연합(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서 중국의 틱톡(TikTok)의(TikTok) 사용금지 명령을 내렸다. 앱 하나만으로도 전화 도청은 물론 이메일 등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미국 역시 테킨트에 높은 경계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우리 정부는 다소 안이하다. 세상 어디에도 '착한 도둑질'은 없다. 외국 첩보기관이 대통령실을 앞마당처럼 접근해서 도청하는 데에도 크게 분개하지도 않는다. 민주당도 문제다.이번 일을 정치공세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 이 모두 미국의 활동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여·야 힘을 모아 미국의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을 단호하게 요구해야 한다. 아무리 혈맹이어도 한번 깨진 신뢰의 금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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