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피를 정상화하라 [이현석의 팔레트]
[이현석의 팔레트]
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홍대입구역에는 신생 출판사와 여러 작가의 지원 기지가 되어온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일명 ‘플랫폼피’(PLATFORM P)가 있다. 플랫폼피는 2010년 서울시가 마포 디자인·출판 특정개발진흥지구를 지정한이래, 출판 중심지였던 지방자치단체의 역사성을 계승하는 것을 고민하던 마포구가 2020년 7월 보스토크 프레스에 운영을 위탁하면서 개관했다.
플랫폼피 입주사 협의회의 배포자료를 보면 이 센터는 개관 뒤 159회의 월례 교육프로그램, 연례 출판문화심포지엄 및 22회의 강연, 11회의 국제교류 강연을 해왔다. 특히 2층은 다양한 분야의 출판 관련 창작자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고, 3층은 출판사 및 유관 산업 사업자 52곳을 선발해 사무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창작산실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5월부터 나도 2층 창작공간을 사용했는데 만 1년간 한권의 장편소설과 세편의 단편소설, 두편의 에세이, 그리고 스무편의 신문 칼럼을 여기서 썼다. 본업인 의료직과 병행하기에는 다소 버거운 작업량을 소화하는 데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저마다의 막막함을 품고 백지 앞을 버티는 동료 작가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난 1일부터 이 공간에서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구청 지시로 마포구 일자리센터 담당자 2명과 마포청년일자리 사업 참여자 15명이 2층 작업공간에 입주한 것이다. 박강수 마포구청장 취임 이후 구는 도서관 예산을 삭감하고 관내 작은도서관 9곳을 사실상 폐관하라는 지시를 내려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책에 어떤 반감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에는 출판산업의 인큐베이터를 없애는 수순을 밟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플랫폼피의 업무가 점진적으로 종료됐으며,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7월에 3층 사무공간의 입주사가 절반 이하로 줄고 연내에는 모든 입주사가 퇴거해야 한다. 보도에 따르면 마포구는 이 공간을 일자리센터로 변경하려 한다. 이런 시도의 합법성은 차치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이미 다수 창출한데다 집적효과까지 누리고 있는 사업모델을 고사시킨 자리에 다시 고용 관련 사업을 이전하겠다는 발상은 탁상행정의 대표적인 예시로 선정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비효율의 극치다. 또한 박 구청장은 구의회 발언을 통해 서울시 시비의 지원이 없음이 지원 축소 및 중단의 사유라 했는데 이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서울시가 2010년 마포 디자인·출판 특정개발진흥지구를 지정할 당시 시장은 바로 오세훈 현 서울시장이었다. 그렇다면 마포구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고 구의 이름을 세계로 알려온 센터를 폐지할 게 아니라, 외려 정책 방향을 끝까지 책임지라고 서울시에 당당하게 지원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지자체 일꾼의 정치적 능력이자 소임일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그의 마지막 소설 <그 남자네 집> 책머리에 모두가 치열하고 남루했던 50년대 초를 묘사하며 동네의 어느 낡은 집에 ‘現代文學社’(현대문학사)라는 간판이 붙던 때를 회고한다. 빈곤이 일상이라 살림집도 목만 좋으면 벽을 헐어 구멍가게를 내는 일이 흔하던 시절, 그런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조선기와집에 그 간판이 붙자 작가는 “그 집뿐 아니라 그 골목까지 갑자기 찬란해졌다”고 말한다. 남루하고 척박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며.
현재 플랫폼피 입주사 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업체는 대부분 오는 7월에 계약이 만료되는 1기 참여사다. 떠날 것이 예정된 사람들이었기에 외면했다면 그들도 훨씬 편했을 테다. 그런데도 마포구가 그간 출판산업 육성에 힘써온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들지 않아도 될 짐을 굳이 짊어졌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남루하고 척박했던 골목이 간판 하나로 얼마나 찬란해질 수 있는가를 아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이 싸움을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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