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해진 평온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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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작가를 똑 닮아있다.
미술을 매개로 세상과 소통하는 작가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전시 오프닝 날 주인공인 작가가 축하하러 들른 이들에게 건넨 인사말도 이 책의 문장처럼 간결했다.
더는 숨을 곳이 없을 것 같아 책을 내게 됐다는 작가의 말처럼 지금 다양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의 제주 풍경 이미지는 책으로, 온라인으로 이어지다가, 세종문화회관 앞의 미디어아트 전시에서도 출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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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서울 말고] 이나연 | 제주도립미술관장
작품은 작가를 똑 닮아있다. 미술을 매개로 세상과 소통하는 작가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삶에 대한 시각과 생각, 태도가 고스란히 작품에 스며들기 때문에,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캐릭터는 도무지 숨길 수가 없어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당연하게도 글도 그렇다. 그림이 많고 글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책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처음으로 글을 써 봤다는 그림작가의 세상이 고스란히 독자인 내게 전달되는 경험을 했다. 글 쓰는 시간보다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던 이가, 어떻게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담백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짧아서 더 진솔하게 다가왔다.
김보희 작가가 최근에 내놓은 <평온한 날>이라는 책 얘기다. 작가가 30여년간 그린 그림 92점에 글을 보탠 그림산문집이다. 천천히 그림을 보듬어보고, 시간을 들여 찬찬히 읽어도 책을 읽는 데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글자의 분량으로 치면, 산문집보다는 시집이나 동화라고 봐도 될 정도다. 그 짧음조차도 작가의 고유한 성격이다. 김보희 작가와는 2022년에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전시 ‘더 데이즈’를 함께 한 인연이 있다. 전시 오프닝 날 주인공인 작가가 축하하러 들른 이들에게 건넨 인사말도 이 책의 문장처럼 간결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요지의 한 문장이었다. 너무 간단한 인사에 부끄러움보다는 겸손함과 솔직함이 더 잘 전해져서 참석자 모두 미소를 한 번 짓고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김보희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 건 작가를 알기 전인 2020년 금호미술관의 개인전 ‘투워즈’에서였다. 미술관 앞에 길게 늘어선 줄로 다시 명성을 얻은 전시였으니,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전시로 김보희라는 작가의 존재감을 알게 됐으리라 짐작한다. <평온한 날>이라는 책이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이 전시였다고 한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의 겨울에 김보희 작가의 서귀포 작업실엘 갔었다. 작가를 처음 봤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검은 개 레오와 작품의 소재가 대거 있는 유명한 정원도 실컷 구경했다. 그리고 책에도 자주 등장하는 남편분도 실제로 뵐 수 있었다. 부부의 차분하고 친절한 인상과 환대부터 큰 개의 낯가림 없는 발랄함, 온통 초록빛으로 추운 날씨에도 관리가 잘된 멋진 정원까지, 모두 책과 그림에서 툭 튀어나온 것들이었다. 삶과 예술이 이렇게 맞닿아 있기도 어렵다.
작가는 그림언어가 아닌 문자로 소통하는 데는 지극히 절제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도 그림산문집을 낸 이유는 전시를 보러오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그림을 전해주기 위한 친절함이었다. 더는 숨을 곳이 없을 것 같아 책을 내게 됐다는 작가의 말처럼 지금 다양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의 제주 풍경 이미지는 책으로, 온라인으로 이어지다가, 세종문화회관 앞의 미디어아트 전시에서도 출몰한다. 서울 강남역의 미디어아트기둥을 점령한 적도 있다. 제주의 자연은 작가의 시선을 경유해, 손을 다시 한 번 지나, 캔버스에 안료로 얹어져 시각화됐다가, 이제는 디지털 이미지로, 출판물로 살아 움직이며 도처에 뻗어 나간다. 은퇴 뒤 제주의 한적한 작업실에서 조용히 그림 작업만 하려고 했다는 작가는 역설적이게도 지금 평온하기보다는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제주가 조용한 자연풍경으로 유혹해 붙잡아 두었던 작가는 이제 모두와 함께 지내는 작가가 됐다. 책의 마지막에 작가가 꿈이라고 적은 내용은 현실이 되었다. “나이 70에 꿈이 있다. 내가 그림 속에서 표현하려는 자연의 경이로움, 생명의 기운, 평화 같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 내 그림이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그런 꿈을 간직하고 오늘도 캔버스를 마주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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