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쥐여준 5루블…소년 샤갈 '사랑의 화가'로 키웠다
가난한 생선가게 일꾼의 아들
"아버지처럼 살기 싫다"
그림 공부 위해 유학 떠나
유대인 탄압으로 억눌렸던 삶
아버지와 아내 사랑으로 극복
타협할 수 없는 종교·예술 간극
조화 이룬 자신만의 작품 그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사와 고고학 등을 주제로 매주 토요일 인터넷에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포털사이트 구독자 1만9000명을 넘어서는 등 뜨거운 독자 성원에 힘입어 지면에도 축약한 원고를 싣습니다. QR코드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으면 더욱 풍부한 이미지와 함께 한경닷컴에 실린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몸에서는 늘 지독한 생선 비린내가 났다.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종일 무거운 청어 궤짝을 날랐다. 그렇게 번 돈은 고작 한 달에 20루블. 9남매를 먹여 살리기엔 벅찬 돈이었다. ‘마치 노예 같다.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어느 날 저녁, 아들은 부모님에게 말했다. “하늘과 별을 들여다볼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화가가 될 수 있게 미술학교에 보내주세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는 대답했다. “네가 미쳤구나.” 아버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갔다. 며칠 뒤, 아버지는 아들을 불렀다. “정 그렇게 부모 속을 썩이고 싶다면 받아라.” 미술학교 수업료, 5루블이었다. 이 철없는 아들의 이름은 마르크 샤갈(1887~1985). 그는 훗날 ‘사랑의 화가’로 불리며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 거장 중 한 명이 된다.
가엾은 아버지, 작품이 되다
샤갈은 원래 화가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는 1887년 러시아 제국(현재 벨라루스)의 작은 도시 비텝스크에 있는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유대인은 정부가 정해준 곳에서만 살 수 있었다.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도, 좋은 직업을 얻을 수도 없었다.
9남매를 먹여 살리는 아버지의 눈에는 언제나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교회를 잠깐 다녀온 뒤 일터로 떠났고, 해가 진 다음 녹초가 돼서 돌아왔다. 그래도 자식들을 사랑했다. “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주름진 갈색 손으로 주머니에서 빵 몇 조각을 꺼내 우리에게 나눠주곤 했다. 아버지가 준 빵은 접시에 담겨 식탁에 올라왔을 때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어머니도 항상 따뜻한 사랑으로 아이들을 품었다. “부모님 덕분에 우리의 식탁에는 언제나 버터와 치즈가 놓여 있었다. 넉넉지는 않았지만 배가 고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시 유대인은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50루블을 마련해 교사에게 뇌물을 주고 샤갈을 학교에 보냈다. 부모의 이런 사랑이 결국 샤갈의 인생을 바꿔놨다. 샤갈이 화가로서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미술학교에 보내달라고 했을 때도, 대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미술 유학을 떠나고 싶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샤갈의 말을 들어줬다. 아버지는 긴 한숨을 쉰 뒤 돈을 주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돈이 없다. 이게 내가 모은 전부다.” 샤갈은 울면서 그 돈을 받았다. 떠나는 샤갈에게 아버지는 어디선가 통행 허가증까지 얻어다 쥐여줬다.
그렇게 길을 떠난 샤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림을 공부하다 후원자를 만나 1910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샤갈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부모님의 사랑과 고향 마을의 풍경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 미술계의 인정을 받았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그러던 중 샤갈은 운명의 여인 벨라를 만나 1915년 결혼했다. “그녀는 내 영혼이다.” 활짝 피어난 샤갈의 마음처럼 그의 작품세계도 사랑으로 꽃을 피웠다. 이 시기 샤갈은 몽환적이고 밝고 아름다운 색을 썼고, 작품 어디에나 벨라를 등장시켰다.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샤갈의 어머니(1915년)와 아버지(1921년)는 아들의 성공을 제대로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샤갈 부부가 파리를 떠나 러시아에 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탓에 한동안 러시아에 살아야 했고, 이때 다른 러시아 화가들의 견제로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샤갈은 벨라와의 사랑으로 이런 슬픔과 어려움을 이겨냈다. 부부는 열심히 돈을 모아 1923년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샤갈은 이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된 후 본격적으로 유럽에 반유대주의가 번지기 시작하며 금세 어려움이 닥쳤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면서 샤갈은 생명까지 위협받게 됐다.
1941년 샤갈과 벨라는 간신히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망명 생활 3년 만에 벨라는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암흑이 내 눈앞으로 모여들었다.” 샤갈은 이렇게 썼다. 고향인 비텝스크는 전쟁으로 파괴됐고, 고향 사람들은 학살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혼자가 된 그는 1947년 아내와의 추억을 좇아 프랑스로 돌아왔고,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도시 생폴드방스에 정착했다.
언제나 사랑은 이긴다
샤갈은 다시 일어섰다. 재혼도 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유엔본부와 시카고예술연구소, 파리 오페라하우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등에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를 남기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97세가 되던 1985년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새롭게 그릴 그림 이야기를 했다. 샤갈의 작품이 높이 평가받는 것은 독창성 덕분이다. 샤갈은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야수파 등 수많은 미술사조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대신 샤갈은 고향의 풍경, 유대인 특유의 정서,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등 자신이 겪은 모든 경험을 그림에 한데 녹였다. 샤갈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고기가 그의 아버지를 의미하는 게 단적인 예다. 세상에 샤갈은 단 한 사람뿐. 하나밖에 없는 삶을 작품에 녹였으니 그림이 독창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것을 한데 조화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과 벨라가 준 사랑 덕분이었다. 여러 비극을 겪은 샤갈이 언제나 사랑과 평화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천이기도 하다.
샤갈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지만 성당이든 교회든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려줬다. 그래서 독일의 미술사학자 인고 발터는 “수백 년에 걸쳐 서로 멀어져 버린 종교와 예술 사조들 사이의 간극을 메웠다. 20세기 거장 중에서도 전혀 타협할 수 없는 것들을 조화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샤갈뿐”이라고 했다.
샤갈을 다른 화가와 구분하고, 샤갈만의 매력을 심고, 그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샤갈이 남긴 이 유명한 말은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채는 사랑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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