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신 ‘북한’ 비핵화···득세하는 남한 ‘핵 보유론’
윤석열 정부 들어 첫 발간한 ‘2023 통일백서’가 ‘한반도 비핵화’ 대신 ‘북한 비핵화’ 표현을 쓴 데에는 북한을 강하게 압박한다는 ‘강 대 강’ 기조가 담겨있다. 남한도 핵을 생산·사용하지 않는다는 한반도 비핵화와 거리를 두는 분위기는 여권 내에서 ‘핵 보유론’이 계속 거론되는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북한 비핵화 문제의 핵심 당사국인 미국은 이러한 점을 감안해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주로 쓰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 사용한 한반도 비핵화 표현을 북한 비핵화로 바꿔썼다. 윤석열 대통령 대선 공약집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정과제 목록, 통일·대북정책 공식 설명자료를 거쳐 지난 14일 발간된 통일백서에 자리매김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1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북한의 일방적인 핵 포기만이 답이라는 목표 의식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 비핵화 표현에는 북한의 불법 핵개발 책임을 분명히 한다는 취지가 깔려있다. 남북이 1991년 채택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남과 북은 핵무기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치·사용을 하지 않는다”고 명시했지만, 현재 남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핵화 문제는 북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 개념이 불분명하다는 현 정부의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통화에서 “북한의 핵과 미국의 핵 우산을 동시에 줄이자는 북한식 ‘조선반도 비핵화’ 논리가 한반도 비핵화와 혼동될 수 있다는 것이 현 정부의 문제 인식”이라며 “한반도 비핵화 개념이 자칫 북한이 원하는 핵 군축 논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비핵화 표현은 국민의힘 계열인 과거 박근혜·이명박 정부에서도 사용됐지만 현 시점에서의 상징적 의미는 더 큰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최근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과 수중 핵무기 ‘해일’, 전술핵탄두 ‘화산-31’, 핵무기 종합관리체계 ‘핵 방아쇠’를 연달아 공개하며 핵 위협을 급속도로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권에서 핵 보유론이 지속 거론되는 분위기의 일환으로도 해석된다. 남한의 비핵화 책임을 내포하는 한반도 비핵화와 멀어짐으로써 핵 보유론이 더욱 득세하는 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북한이 대남 전술핵 선제공격까지 시사한 이상 남한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핵 보유론의 골자다.
김기현 대표 등을 중심으로 국민의힘 내에서 미국 확장억제력 강화를 넘어선 전술핵 재배치, 나토식 핵 공유, 자체 핵개발 방안 등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핵 보유에 거듭 선을 긋고 있지만 윤 대통령이 지난 1월 “자체 핵 보유” 가능성을 직접 거론해 파장이 일었다. 지난해 10월 정진석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파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도 이러한 남한 내 움직임을 경계하며 한반도 비핵화 표현을 써왔다. 북핵 문제의 핵심 당사국이자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수호하려는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 국무부·국방부는 북핵 위협이 고조되고 남한 핵 보유론이 제기될 때마다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라며 선을 그어왔다.
한·미·일 정상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프놈펜 공동성명에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공약을 재확인한다”는 표현이 쓰였고,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 첫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도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재확인한다”고 명시됐다.
박광연 기자 lightyea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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