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화랑의 흐린 기억, 69년만에 되짚다
국내 첫 상업 갤러리 '천일화랑'
김중현·구본웅·이인성 화백의
3인 유작전 사료 등 아카이브전
'근대미술 거장' 21명 작품 전시"현대 미술사의 뿌리를 찾는 작업"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9월 전쟁 중 사망한 세 명의 작가인 김중현(52)·구본웅(47)·이인성(38)을 위한 추모전이 서울 종로4가의 당시 천일백화점 내 천일화랑에서 열린다. 전시는 ‘유작 3인전’. 전시회의 모든 비용은 천일화랑을 운영하는 이완석(1915~1969)이 부담했다. 천일화랑은 1954년 7월 천일백화점과 함께 문을 연 화랑이다. 친구이기도 한 가난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백화점을 찾는 이들에게 판매도 한다는 요즘 형태의 상업적 화랑이었다.
그 당시 이완석의 예술가 친구들은 오지호, 남관, 임군홍, 이인성, 윤중식, 손응성, 유영국, 최영림, 장욱진, 이준, 이대원, 임직순, 홍종명, 정규, 문신, 권옥연, 천경자, 변종하, 김환기, 김향안 등 미술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이다. 이후 딸인 이숙영이 1978년 인사동에 예화랑을 오픈했고 외손녀인 김방은 대표가 신사동에서 화랑을 운영 중이다.
이완석의 화랑은 문을 닫았지만 예술을 사랑한 이완석과 친구들의 관계, 그리고 작품은 이제는 보존하고 발굴해야 할 미술사의 사료가 되었다. 김방은 예화랑 대표가 공공미술기관이 할 법한 이 대규모 아카이브 기획을 해냈다.
외조부와 인연을 맺은 한국 근대미술 초창기 작가 21명의 작품이 신사동의 예화랑에 선보인 것. 예화랑은 45주년을 기념해 천일화랑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아카이브 형식의 전시회 ‘밤하늘의 별이 되어’전을 개최한다.
김 대표에게 이번 전시의 시작은 사실 외조부의 일대기를 연구하는 사적인 작업이었다. 그러다 처음 천일화랑에서 열린 ‘3인 유작전’과 관련한 사진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김중현·구본웅·이인성의 유가족과 연락이 닿았고, 그들 덕분에 귀중한 역사적 사료가 될 만한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사진을 발견했다.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천일화랑이 박물관처럼 신사동 예화랑에서 되살아난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을 대거 감상할 수 있다. ‘유작 3인전’에 출품한 3인 중 구본웅의 작품은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오로지 대표작 ‘친구의 초상(1935)’만 남아있다. 구본웅이 친구이자 시인인 이상을 그린 그림이다. 그의 차남 구상모 씨는 1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부산까지 피란 가며 싸들고 다닌 몇 점의 그림 중 김해경(이상)의 초상이 있었다”며 살아남은 작품의 뒷 이야기를 전했다.
전시관 1층에는 69년전 유작전에 출품된 이인성의 풍경화 소품과 구본웅의 인물 데생화를 볼 수 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여사의 작품도 이 곳에 전시돼 있다. 많은 작품이 예화랑이 직접 소장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전시의 핵심은 3층의 아카이브. 한국화 대가 청전 이상범, 김환기, 이마동 등 근현대 회화의 거장들이 의자에 앉아있는 1954년 천일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유작전’의 개막식 사진 9장은 ‘3인 유작전’ 중 한 명인 이인성 화백의 아들 이채원 씨가 어릴 때부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사진을 건네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이번 전시가 끝나도 남겨져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료다. 아쉽게도 당시 ‘3인 유작전’에 출품된 작품은 소장자들과 합의되지 않아 전시되지 못했지만 3층 건물의 예화랑 벽에 걸린 작품 만으로도 관람객들은 근현대 미술사의 흐름을 한 번에 보고 느낄 수 있다.
이날 전시회를 기획한 김방은 대표는 “2년 전 한 재단으로부터 외조부의 포스터를 확인하는 전화를 받은 이후 고인의 행적을 찾는 작업을 시작하다 보니 한국 현대미술사의 뿌리를 찾는 작업으로 확대됐다”며 “69년 전 출품작은 공공미술관에 들어가거나 다른 소장자로 넘어가 한 점도 나오지 않았지만 천일화랑의 시체와 전시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 기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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