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체포 나선 ICC… 전범 단죄로 ‘종이호랑이’ 탈피하나 [세계는 지금]

이지안 2023. 4. 1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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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전쟁 계기 도약 모색
러에 끌려간 아동 31명 반년만에 귀환
불법이주 혐의 푸틴에 체포영장 발부
현직 국가원수 상대 역대 세번째 영장
체포 가능성 낮지만 전범 낙인은 효과
ICC 회원국에 美·中·러 빠져 성과 못내
전쟁 발발이후 국제사회 지원 전폭 늘어
美도 태세 전환 러 전범 조사 협조 나서
北·이란 인권침해 범죄 개입 가능성도

우크라이나 소녀 발레리아에게 올해 4월 8일(현지시간)은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이다. 약 6개월 전 생이별한 엄마를 다시 만난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가 점령했던 하르키우·헤르손 지역 부모들은 아이들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에 머물기 바라는 마음에서 러시아 정부가 선전하는 무료 어린이 여름 캠프를 등록했다. 캠프는 ‘자녀의 건강 개선’, ‘안전한 휴식’ 등의 문구로 부모들을 안심시켰다.
발레리아가 지난 8일 우크라이나-벨라루스 국경을 통해 귀국한 키이우에서 수개월 만에 만난 엄마를 끌어안은 모습. 키이우=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8월 말 버스를 타고 러시아 흑해로 떠난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우크라이나가 그다음 달 하르키우를, 11월 헤르손을 탈환하자 러시아가 돌아갈 길이 막혔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강제 이주한 우크라이나 아이 수는 600∼7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8일 발레리아를 포함해 그중 31명이 키이우로 귀환했다.

◆체포영장에 꼬리 내린 푸틴

31명의 귀환은 러시아서 우크라이나로 오는 길이 새로 뚫렸거나, 러시아가 어린이들의 의사를 존중해 기꺼이 보내주기를 택해 이뤄진 것이 아니다. 국제형사재판소(ICC) 공이 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ICC는 지난달 1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마리야 리보바벨로바 대통령실 아동인권담당위원에게 아동 불법 이주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푸틴 대통령에 대한 영장은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 당시 대통령,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당시 국가원수에 이어 ‘살아있는 권력’인 현직 국가원수를 상대로 발부된 역대 세 번째 영장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아이들을 보호 중”이라고 억지 부리던 러시아가 슬슬 꼬리를 내렸고, AP통신은 국제적십자위원회가 리보바벨로바 위원과 아이들의 송환을 위해 논의 중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18일 푸틴에 대한 영장을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혐의 확정에만 수년이 걸리던 전례와 달리 현재 진행 중인 범죄에 신속히 대응했다는 것이다.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의 경우 2003년에 시작된 ‘다르푸르 학살’ 관련 전범 혐의로 2009년에서야 기소됐다.

푸틴 대통령을 당장 체포할 가능성은 작아도, 그를 전쟁 범죄자로 낙인찍은 영장이 갖는 상징적 의미 자체가 크다는 평가도 나온다. 소멸시효 없는 ICC 영장은 러시아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도 낸다고 미 CNN방송은 분석했다. 푸틴이 체포 위험이 있는 ICC 회원국을 쉽사리 방문할 수 없게 되면서 그의 운신 폭이 크게 줄었다는 얘기다. 푸틴 대통령은 오는 8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는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정상회의에 초대받았는데, 남아공이 ICC 회원국이다.
◆우크라 전쟁으로 도약 모색하는 ICC

ICC는 전쟁범죄와 집단학살 등을 저지른 개인을 신속히 처벌하기 위해 2002년 설립된 재판소다. 문제는 회원국이다. 123개 회원국에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요 패권국이 빠져 있어 ICC는 ‘종이 호랑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러시아는 ICC의 설립 조약인 ‘ICC에 관한 로마규정’에 2000년 서명했으나 비준하지 않았고, ICC가 러시아의 2014년 크름반도 강제 합병을 전쟁범죄로 규정하자 2016년 서명도 거둬들였다.

ICC의 성과 역시 저조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ICC가 지금까지 내린 유죄 판결은 10건에 불과하다. 그 역시 콩고, 우간다 등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범죄에 집중돼 있다. ICC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힘의 논리’에 좌우된다는 비판을 받는 대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부터는 새 국면이다. 우선 ICC를 향한 국제사회 지원이 늘었다.

지난달 영국을 비롯한 20개국이 400만파운드(약 65억원)를 ICC에 지원하기로 했다. 수사관 등 인력 증원 약속도 나왔다.

전 세계 전장을 누벼 전쟁범죄 논란에 상시 노출된 터라 ICC와 ‘거리 두기’를 해왔던 미국도 태세 전환 중이다. 지난해 미국 의회 상원은 ICC의 러시아 전범 조사에 전폭 협조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이후 ICC에 대한 재정·기술적 지원을 위한 법적 검토를 시작했다. 이전 미 의회는 1999년과 2002년 행정부의 ICC 지원을 제약하는 법안을 만들었고, 2002년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자국민 기소 가능성을 우려하며 러시아처럼 로마규정에 대한 서명을 철회했다.

엘리자베스 살몬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 연합뉴스
◆북한 인권 문제도 건들까

지금은 러시아가 최대 타깃이지만 ICC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향후 심판대에 오를 나라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세계 유일 세습 독재 체제 아래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인권유린을 자행한다는 북한과 반히잡 시위대를 공개처형하며 여성·시민권에 대한 폭압을 멈추지 않는 이란 등이 대표 후보군에 꼽힌다.

국제사회는 특히 북한에 대한 ICC 차원의 대응을 촉구 중이다. 엘리자베스 살몬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은 푸틴 대통령의 영장이 발부된 지난달 17일 안전보장이사회 비공식 회의에 참석해 “북한 내 인권침해 범죄에 대한 정권 책임자들을 ICC에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ICC에 회부하기는 쉽지 않다. 북한 역시 ICC 회원국이 아니며, 안보리가 ICC에 직접 북한 인권침해 범죄를 수사해달라고 요청한다 해도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직접 김정은 정권을 ICC에 제소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우리 헌법이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고 국내 영토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요청만 있다면 ICC가 북한 인권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前 ICC 소장 송상현 명예교수 “‘돈키호테’ 같은 나라 나타나 푸틴 체포할 수도”

“갑자기 ‘돈키호테’ 같은 나라가 등장해 체포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을 지낸 송상현(82·사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1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발부된 ICC 체포영장 실효성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러시아라는 강대국의 대통령을 어느 나라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잡아 보내겠냐고 생각하겠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며 “푸틴 대통령도 이를 알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유로운 해외 이동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송 교수에 따르면 ICC는 영장 발부에 이어 전 세계 모든 국가, 즉 러시아를 포함해 ICC 비회원국들에도 ‘푸틴 대통령을 체포해 ICC로 인도해주기 바란다’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송 교수는 “영장은 푸틴 대통령의 정적들에게 그를 비판할 좋은 구실이 된다”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기반에도 균열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ICC 지원 가능성에 관해서 묻자 “사실 미국은 지금도 뒤에서 ICC에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답했다.

송 교수는 “소장 시절 중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협상 등을 맡았을 때 현지 미국 기관의 도움이 결정적이고 효과적이었다”며 “미국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런 물밑 협조와 별개로 미국의 공개적인 ICC 지원이나 가입은 이뤄지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송 교수는 “미국은 전통적으로 국제조약이 국가 주권을 제한한다고 생각해 웬만하면 비준하려 들지 않는다”며 “오죽하면 전 세계에서 유엔아동권리협약(UNCRC)을 가입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라고 설명했다.

이지안 기자 ea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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