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길손 반겨 노란옷 두른 ‘섬’…하마 질세라 천천히 걷는 ‘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자연보전
다랑논 가득 유채꽃 황금물결 너울
영화 ‘서편제’ 나온 길에 관광객 발길
전복야채전·군소무침 등 메뉴 눈길
◆모든 게 천천히…느림의 섬=아침 일찍 완도항에 가니 큰 배가 한척 서 있다. 하루에 여섯번 있는 배는 늘 승객들로 꽉 찬다. 청산도행 선박이 힘차게 출항한다. 이내 기름진 햇살 맞은 수면이 반짝거리자 여기저기서 ‘와와’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청산도는 완도에서도 19.2㎞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 섬이다. 완도항에서 출발한 지 50분, 예쁜 풍경도 지루할 때쯤 청산도에 다다른다. ‘느림의 섬’. 섬 입구에 있는 달팽이 모양 표지석에는 네 글자가 박혀 있다. 달팽이는 청산도를 상징한다. 이곳은 자연을 잘 보전한 점을 인정받아 2007년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에 선정됐다.
“해성관광은 이쪽으로 오세요!” “어머님, 물건 좀 보고 가세요! 전복이 좋아요.” “서편제길 가려면 저 버스 타세요!”
4월의 항구는 한껏 들뜬 관광객과 상인들로 북적거린다. 마침 이달부터 다음달초까지 ‘슬로걷기축제’가 열린다. 이곳은 ‘슬로길’이라는 이름의 11개 코스, 17개 길이 있다. ‘뚜벅이’에겐 항구와 가까우면서 풍경이 아름다운 제1코스가 특히 좋다. 제1코스는 항구 옆 미항길을 지나 동구정길·서편제길을 따라간다. 거리는 5.71㎞로 바쁘게 걸으면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훤한 섬…구석구석 유채꽃 만발=청산도는 유채꽃이 유명한 꽃섬이다. 봄꽃은 피는 데 순서가 있다. 도시에서 봄은 이상기후 때문인지 작별할 새도 없이 꽃이 한꺼번에 피고, 같이 져버렸다. 다행히 청산도는 여전하다. 동구정길을 걷는데 해풍 때문에 몸을 땅에 딱 붙인 민들레가 보인다. 그뿐이랴. 남쪽에서는 흔한 붉은 동백꽃도 활짝 피어 있다.
“아따, 쫌만 일찍 오제. 며칠 전에 벚꽃이 징하게 이삡디다.”
바다를 따라 30분 정도 덱(Deck) 길을 걷는데 일모자에 일바지 차림인 어르신들이 다가온다. 바쁘게 어딜 가시냐고 묻자 “꽃 심으러 가요잉”이라며 수줍게 웃는다. 얼마 전 떨어진 청산도 벚꽃을 퍽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어르신들 입에서 꽃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긍게 바람 붕게 벚꽃이 떨어져배. 그라도(그래도) 봄잉게 섬이 훤하요.”
‘훤한 섬’. 서편제길에 다다르자 비로소 그 말이 이해된다. 서편제길에서 내려다보니 다랑논에 유채꽃이 그득 피어 황금물결처럼 너울거린다. 널따란 유채꽃밭의 노란빛에 섬은 불을 켠 것처럼 환하다. 꽃냄새는 숨이 막힐 듯 향긋하다. 낮은 산봉우리는 다랑논과 수묵화처럼 부드럽게 이어져 짙푸른 바다를 너그럽게 감싸 안는다. 그 덕인지 바다는 복주머니 모양. 전복 양식장이 바다 위에 둥실 떠 있다.
다랑논은 물이 부족하고 비탈진 지역에선 흔한 광경이다. 다만 청산도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구들장논’이 있다. 논을 만들고자 쌓은 돌이 난방할 때 쓰는 구들장이라 붙인 이름이다. 물을 잘 활용하려고 밑에는 배수로를 두고, 위는 흙으로 덮어 벼농사를 지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청산도에서만 발견되는 올망졸망 구들장논은 섬 전체에 퍼져 있다. 요즘은 손님맞이 유채꽃을 심어둔 곳이 대부분이다.
“청산도에 유채꽃밭만 26.5㏊가 있어요. 섬 안쪽은 10∼11월부터 파종하고, 여기 서편제길 유채꽃밭은 12월에 파종해서 5월까지 펴요. 요걸로 장아찌도 하고 나물도 먹죠.” 청산도에서 유채농사를 하는 신순민씨의 설명이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서편제길에선 아리랑을 부르며 어깨춤을 추는 관광객이 유독 많다. 1993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에서 이름을 따왔다. 보통 영화를 찍으면 세트장만 하나 덜렁 남지만, 청산도엔 아직도 영화에서 나온 길이 그대로 있다. 덕분에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길을 걷는 사람들이 영화 <서편제>를 기억한다.
◆풍경이 안주인 주막…돌아서니 그리움=걷느라 지친 다리는 다랑밭 꼭대기에 있는 ‘서편제 주막’에서 쉰다. 이름만 주막이지, 실은 전망대다. 여기선 다랑논 경치가 한눈에 다 보인다.
서편제 주막에선 지역특산물로 만든 메뉴가 많다. 우리나라 토종 ‘코끼리마늘’로 만든 ‘코끼리흑마늘 해물파전’, 청산도 전복을 넣은 ‘전복야채전’, 청산도에서 약 20㏊(6만평) 재배한다는 색깔보리로 만든 국수 등이 있다. 때를 잘 맞추면 ‘유채튀김’도 맛볼 수 있다. 여기에 막걸리를 안 시키면 섭섭하다. 막걸리 한 사발 걸치며 바다를 보니 풍경이 안주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간다고 서편제 주막 옆 빵집인 ‘청산 빵굽네’도 들렀다. 색깔보리로 만든 카스텔라, 청산도 해녀들이 캔 톳과 성게를 넣은 머핀, 미역으로 만든 카스텔라, 달팽이 모양 롤케이크 등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이색 빵이 눈에 띈다.
부른 배를 꺼트리며 느릿느릿 항구로 돌아가니 벌써 오후 3시. 완도행 배 때가 금방이다. 천천히 걸어 깊게 파고들수록 아름다운 섬. 앞으로 봄이란 단어를 들으면 문득 샛노란 청산도가 떠오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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