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과 방법론’만 가득한 경영 전략, 망하는 지름길[경영 전략]
[경영 전략]
경영학 책에는 그럴듯한 개념과 방법론이 가득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상식을 이론과 사례로 포장해 꾸며 놓은 것인데 뻔한 얘기일수록 포장은 더욱 요란하다. 차마 남들 다 아는 얘기로 월급 받기가 민망한 실무자들의 사연도 있고 그런 포장이 있어야 지적 허영심이 달래지는 한심한 경영자도 있을 것이다.
뻔한 얘기를 요란하게 꾸민다고 회사가 망하지는 않는다. 컨설팅 비용을 좀 뜯기고 말만 많은 사람들을 방구석에 모아 월급에 종이 값만 쓰면 되니까…. 비극은 포장만 그럴듯한 얼치기 전략이 정말로 사업이 될 때 시작된다. 그런 전략을 꾸민 얼치기 책상물림들이 사업비를 펑펑 쓰며 실세가 돼 버리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온 세상이 다 아는 엔론 사태 역시 야심 가득한 경영자가 자본 시장의 입맛에 맞는 ‘참신한’ 사업들로 돈을 끌어들이고 여기에 그럴듯한 사업으로 남다른 안목과 전문성을 과시해 몸값을 높이려는 말만 많은 경영 전문가들이 가세하면서 시작됐다. 사업의 구체적 내용은 뒷전이고 요란한 포장이 앞서다 보니 난감한 실적은 더욱 부풀리고 꾸밀 수밖에 없었다. 돈줄이 막히니 거품은 터진 것이고….
‘허드렛일’로 여기던 창고-배송이 전략의 핵심으로
경영 전략 분야의 수업이나 전문 서적에서 창고·배송을 핵심으로 다루는 것은 많지 않다. 산업의 구조적 특성을 분석한다지만 경쟁자나 공급업자·판매처 등 관련 사업들에 대한 주도권을 생각해 보는데 그친다. 핵심 역량과 경쟁 우위를 얘기할 때도 대부분 기술적 수월성에 초점을 맞춘다(그래서 경쟁자가 따라오지 못하는 압도적 우위 운운하는 공상으로 흘러가곤 한다).
인터넷과 모바일이 세상을 바꾼다며 아마존이나 이베이 같은 플랫폼 사업자의 등장을 찬양할 때도 ‘생태계를 주도하는 입지와 네트워크 효과’를 강조할 뿐 창고를 확보하고 배송·반품 처리하는 현장의 구체적 활동들에 주목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한국에선 한술 더해 원자재·부품 조달과 제품 배송을 핵심으로 하는 델컴퓨터가 난데없이 첨단 정보기술(IT)의 대표로 포장돼 각종 콘퍼런스에 등장하기도 했다. 유명한 외국 연구를 베껴 폼 잡기도 바빠서인지 경영에 대한 환상이 더 커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마존의 온라인 쇼핑 사업을 생각해 보자. 온라인 거래와 결제의 시스템은 사실 이미 널리 보급된 평범한 기술이다. 불만 처리와 환불·반품의 절차도 어렵지 않게 구현할 수 있고 경쟁자인 월마트도 언제든 돈만 쓰면 따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빠른 배송과 편리한 반품을 위해서는 창고·배송 같은 돈 주고 시키면 된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중요하다. 오히려 곳곳에 배송 창고와 오프라인 매장을 갖고 있는 월마트가 더 유리할 수도 있다.
넓은 미국 대륙에서 창고 보관과 배송에 드는 비용이 가격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고 한국과 달리 집집마다 배송해 직접 전달하기도 어렵고 반품은 더 어렵다. 신선도 때문에도 직접 자주 갈 수밖에 없는, 그래서 고객 유인 역할을 하는 식료품은 온라인 쇼핑에 한계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퇴근길에 가까운 월마트 점포에서 물건을 수령하고 직접 반품이나 수선을 맡길 수 있다면 오히려 다급한 쪽은 아마존이 된다. 드론이나 자율 주행차의 보급, 자동화된 물류 시스템 등의 기술 혁신도 오히려 허드렛일로 여기던 창고·배송 같은 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마존은 2017년 식료품 유통 체인 홀푸드를 인수하고 이어 무인 편의점 아마존 고, 물품 보관과 수령에 초점을 둔 아마존 프레시픽업을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고객 접점을 확보하고 배송·수령·반품 등을 위한 오프라인 기반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때 대단한 혁신으로 여겨지던 IT 시스템은 돈만 주면 언제든 갖출 수 있는 반면 땀냄새 가득한 현장의 허드렛일이던 창고·배송, 특히 가장 말단의 고객 접점 서비스가 차별적 전략의 핵심이 된 것이다.
거창한 혁신 vs 사소한 차이
기술적으로 대단한 차이가 있어도 막상 사용자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한편 사소한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기술적 우수성을 압도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삼성전자는 아이패드에 맞서는 싸고 튼튼한, 기능적으로도 크게 밀리지 않는 태블릿을 개발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태블릿의 데이터 포트가 품질이 낮아 영상물 사용이 불편한 점이 드러났다.
삼성전자의 태블릿이 출시되던 무렵에는 데이터 통신 여건이 지금과 달라 영상물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받아 태블릿에 옮겨 사용했다. 그런데 이 통신 포트 때문에 다운로드 속도가 떨어져 예능물이나 영화 하나를 옮기는 데 20분 넘게 걸리니 태블릿 사용자들에게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디스플레이·사운드·전력 사용 등에서 싼값에 높은 성능을 구현해 낸 성과는 인정받지도 못했다.
이 회사의 상품 기획자나 개발자들에게 태블릿은 ‘휴대용 사무 기기’였을 뿐 드라마·예능·영화를 보는 미디어 기기가 아니었다. 새벽부터 출근 준비해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회사원들은 태블릿의 사용자들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마케팅 조사에서 보여주는 사용자 환경과 사용 패턴에 대한 분석을 봐도 ‘비싼 태블릿을 손바닥 TV로나 사용하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싸고 좋은 기기를 다운로드가 조금 느리다고 불만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세상은 남들 사정 다 살펴 종합 점수를 주지 않는다. 하나라도 싫으면 안 산다. 전쟁도 마찬가지인데 줄곧 이겨도 작은 패배로 나라를 잃는 경우가 있다. 리그전을 벌여 종합 성적을 따지는 프로 야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디테일이 없는 책상물림 전략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 회장은 ‘기획’, ‘전략’ 같은 단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정책 방향이 어떻고 말만 많고 사업의 구체적 내용 없이 구름에 뜬 소리만 한다는 얘기다. 사실 전략은 ‘손자병법’에도 나오듯이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소설 ‘삼국지’의 제갈량과 달리 전쟁사의 군사(軍師)는 신출귀몰한 작전보다 군대를 먹이고 군수 물자를 갖춰 보내는 역할이 훨씬 컸다고 한다.
경영 전략 분야는 원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군수(軍需) 업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정립했다. 베트남 전 당시 미국 국방장관을 맡았던 로버트 맥나마라도 이들과 군수 업무와 대학 일을 함께 했는데 여기에 포드자동차에서의 경험을 더해 미국의 군수 체계를 개편했다.
아마존의 예에서 봤지만 일정에 맞춰 물자를 보내고 서비스하는 일이 허드렛일이 아니라 원래 전략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교과서와 논문에 나오는 경영 전략은 핵심 사안을 간결하게 개념화하는 학문 세계의 문법을 따른다. 다양한 상황에 적용해 핵심을 짚으려면 추상화된 일반 모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얼치기 책상물림들은 여기까지만 외워 떠드니 구체적 현실이 사라져 버린다. 전공을 여러 갈래로 나눠 놓으니 ‘다른 분야’는 모르는(혹은 슬쩍 빼는) 황당한 일도 벌어진다. 세상일에 도움이 되려던 공부가 오히려 방해를 하는 셈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지만 자칫 공허한 말잔치로 흐르기 쉬운 경영 전략은 더더욱 이 디테일에서 멀어지기 쉽다. 악마가 제멋대로 망치기 딱 좋다는 뜻인데 제갈량이나 맥나마라까지 갈 것도 없이 ‘허드렛일’이 전략의 핵심이 된 아마존의 사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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