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국민 화가’ 이중섭의 미공개작, 어떻게 세상에 나왔나
이중섭의 미공개작이 있다! 어느 저녁 자리에서 지인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순간, 당연하게도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그림이고, 우연히 알게 된 한 개인이 그림을 갖고 있다. 그때 제가 들은 정보는 그게 다였죠. 도대체 어떤 그림일까?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을 꾹 참고 언젠가 그림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으려니,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이후 그 꿈이 실현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송정훈이라는 생소한 화가로부터 비롯된 인연
송정훈(宋政勳, 1915~1981). 이 낯선 화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송정훈은 1915년 8월 1일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중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에 있는 태평양미술학교를 1936년에 졸업합니다. 그리고 그해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할 때까지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개인전을 포함해 10여 차례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1936년 제11회 국화회전(國畵會展)에 '아편굴의 입구'라는 작품을 출품해 입상했고, 상해극동미술전(上海極東美術展)에 '귀로', 1937년 조선미술전(朝鮮美術展)에 '고국의 추상'을 출품해 입선합니다. 이후 1941년 무한미술전, 제2회 성전미술전에서 입상했습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중국의 풍광을 담은 '신경(新京)의 인상(印象)'(1936) 등 기행화첩을 조선일보에 연재했습니다.
송정훈은 해방 전까지 주로 중국에서 화가로 꽤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울과 충북 등지에서도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해방 후 1947년에는 화가 배운성 등과 함께 제1회 앙데팡당전을 서울 동화화랑에서 열었고, 1950년 5월에는 일본 도쿄 일동화랑에서 한국현대미술전람회를 열어 한국 문화의 비약적 발전상을 소개하기도 했죠.
송정훈의 이력에서 특기할 것은 1945년 8월 20일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349번지에 국제보도연맹을 창립해 인쇄 매체를 통해 새롭게 탄생한 대한민국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다양한 사진화보집을 발간한 점입니다. 월간 사진잡지 <국제보도>를 45호까지 발간했고, 연간 <한국화보(Pictorial KOREA)'를 14권 펴냈습니다. 6·25전쟁 때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 종군사진기자로 활동합니다.
일찍부터 인쇄업에 눈을 뜬 송정훈은 국내 최초로 컬러 인쇄기를 도입한 인물로도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화가로서보다는 인쇄출판업자로 한국 사진의 역사에 짙은 발자취를 남겼죠. 송정훈 화백 이야기를 길게 한 까닭은 이중섭 그림의 소장자가 바로 송 화백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장자는 어떻게 이중섭의 그림을 갖고 있었을까.
■송정훈과 이중섭을 연결하는 '결정적인 사진'
사연은 이렇습니다. 생전에 이중섭과 송정훈은 절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유학한 조선인으로서 분명히 서로 잘 알았을 거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이후에도 이어져 해방 이후 송정훈이 서울에서 인쇄소를 운영할 때도 두 사람은 꾸준히 교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인연을 보여주는 실물 증거가 필요했죠. 혹시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 같은 게 없을까. 그렇게 수소문하던 차에 미술평론가 최열이 쓴 『이중섭 평전』에서 결정적인 사진을 찾아냅니다.
『이중섭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1954년 6월에 경복궁에서 열린 제6회 대한미술협회 전람회 당시 찍은 것으로 왼쪽은 손응성, 중앙이 이중섭이다." 사진 속 인물들의 옷차림을 보면 도저히 6월 사진으로는 생각되지 않지만, 1954년 늦가을 혹은 겨울에 경복궁 앞에서 찍은 것은 분명히 보입니다.
가운데 키 큰 인물이 이중섭, 왼쪽은 화가 손응성입니다. 하지만 오른쪽 인물의 이름은 없죠. 바로 송정훈 화백입니다. 1954년에 이중섭과 송정훈이 같이 찍은 사진. 두 사람의 인연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이중섭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는 이 사진이 보여주는 둘의 인연에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송정훈의 인쇄소에 간 이중섭의 그림 선물
두 사람은 생전에 어떤 관계였을까. 현재 이중섭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송정훈 화백의 아들 송현 씨의 증언을 들어봅니다.
"아버님이 1915년 생이시고, 그 당시는 중학교가 6년제이니 지금의 고등학교 졸업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시고 활동하시면서 일본 전람회에서 입상을 하셨습니다. 이중섭 화가와는 나이가 1년 차이이고, 이중섭 화가도 일본에서 활동하셨으니 교류가 있었겠지요.
다만 저희 아버님은 일본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하신 뒤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얼마만큼 친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이 상하이에서 광고 사업을 하셨는데 그것이 매우 잘 되었나 봐요. 그래서 저는 본 적 없지만, 해방 직후에 저희 집에 차도 한 대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컬러 인쇄기를 일본에서 들여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 많은 예술 하는 사람들이 오셨다고 합니다. 이중섭 화가도 그때 저희 집에 몇 번 오셨나 보고요. 오시면 가끔 그림을 그려서 주셨다고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중섭 화가 그림이 담뱃갑 등에도 그린 것이 있어서 당시 우리 집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 그림들을 쓰레기통에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송정훈과 이중섭이 교류하던 시기에 소장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구체적인 정황까지 설명해주지는 못하지만, 생전에 부친 송정훈 화백으로부터 이중섭 화백 이야기를 듣고 자란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송정훈의 인쇄소가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고, 이중섭도 서울에 머무는 동안 인쇄소를 여러 차례 방문했던 거로 보입니다.
이중섭의 그림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중섭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송정훈의 인쇄소에 갔다가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송정훈에게 선물로 줬다. 송정훈은 이 그림을 줄곧 간직했고,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과 함께 보관해 왔다. 이렇게 해서 이중섭의 그림이 탄생한 배경, 그리고 송정훈 화백의 아들이 그림을 소장해온 내력이 명쾌하게 설명됩니다.
■어떤 작품인가…기법은 익숙, 재료와 색감은 특별!
먼저 크기를 재봤습니다. 세로 15cm, 가로 24.5cm. 이중섭이 담뱃갑 속지에 그린 '은지화'의 배가 넘는, 이중섭의 그림으로는 작지 않은 크기입니다. 재료는 제법 두께가 있는 인쇄용지와 유성 잉크입니다. 작품의 상태를 꼼꼼하게 검토한 결과, 먼저 누런 인쇄용지의 빈 면에 인쇄용 검정 유성 잉크를 넓게 펴 바른 뒤,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끝이 뾰족한 도구로 선을 그려 완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기법은 은지화에서 워낙 많이 써봤기 때문에 이중섭에게는 퍽 익숙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다만 인쇄용지와 인쇄용 잉크라는 재료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중섭의 그림에선 전혀 못 보던 거죠. 게다가 이중섭의 그림 가운데 바탕이 이렇게 짙은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기법은 익숙하지만, 재료와 색감이 특별한 작품입니다. 뒷면을 보면 인쇄용지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테두리가 매끈하지 않은 건 그림을 완성한 뒤에 가위 같은 것으로 그 자리에서 오려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 투박함마저도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더군요. 이 그림의 가장 큰 가치는 그런 '즉흥성' 또는 '현장성'이 아닌가 합니다. '각 잡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놀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쓱쓱 그려준 그림. 재료의 특성이 인쇄소라는 장소, 송정훈이라는 사람과 결부돼 특별한 인연을 증거합니다. 이 작품이 더 특별한 이유죠.
이번엔 그림의 내용입니다. 왼쪽으로 이중섭과 아내, 옆으로 두 아들의 얼굴이 보이죠. 그 사이사이에 꽃과 나뭇잎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중섭이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그린 가족의 모습입니다. 그럼 제목은? 아직 아무도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니, 이 참에 '가족'이라고 부르면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이중섭의 진품으로 보는 근거는?
어떤 작품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을 때 반드시 사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바로 진위 여부입니다. 취재 단계부터 작품을 면밀하게 감정한 미술사가 황정수 씨는 작품의 출처, 그림에 보이는 화풍, 작가의 서명 모두 의심의 여지 없는 이중섭의 그림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작품의 진위를 판단할 때는 가장 중요한 게 출처입니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출처가 정확하지 않으면 우리가 따져봐야 하는데, 이 작품은 이중섭 선생과 가까웠던 송정훈 선생이 직접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진품이라고 볼 수 있고요.
두 번째는 작품의 내용입니다. 내용에 나오는 인물이나 여기에 그려져 있는 나무, 나뭇잎 이런 것들의 표현 방식이 다른 그림에 나오는, 이중섭의 그림에 나오는 도상과 거의 일치합니다. 그런 것으로 봐서도 충분히 알 수가 있고요.
마지막으로 서명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사한 그림을 그린다 하더라도 서명만은 본인 특유의 필체가 나오기 때문에 필체가 다르면 진품이라 할 수 없는데, 이 작품에 나와 있는 한글로 '중섭'이라고 쓴 것은 이중섭의 1950년대 그림에 나오는 서명과 완벽히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진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궁금한 것, 일반 공개는 언제쯤?
백문이 불여일견. 이제 이 귀한 작품이 세상에 나왔으니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어야겠죠. 당연히 소장자에게 물었습니다. 일단 소장자가 처음부터 이중섭의 작품을 공개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와의 귀한 인연이 간직된 작품이니만큼 마찬가지로 화가였던 아버지의 유품과 자료를 더 늦기 전에 정리해서 기념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죠.
더군다나 일제강점기에 꽤 활발하게 화가로서 활동했는데도 관련 기록이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무척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소개했듯 송정훈 화백의 행적은 여러 기록을 통해 상당 부분 밝혀져 있고, 이제는 어디에 있을지 모를 작품을 수소문하고 찾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료들이 차곡차곡 모이면 '화가 송정훈'이 이대로 묻히지 않도록 번듯한 전시회를 열어드리는 것이 자식으로서 가장 큰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멀지 않은 시기에 이중섭의 이 귀한 그림을 많은 사람이 함께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김석 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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