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의 나라 키프로스]③ 디오니소스도 마셨다는 6000년 와인의 산지
연간 와인 생산량 50만병… 20%가 코만다리아
토종 포도로 만들고 제조법도 법으로 지정
키프로스 남서부 파포스 고고학 공원에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를 표현한 모자이크가 남아있다.
2세기 후반 또는 3세기 초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작품 속 디오니소스는 한 손에 포도를 움켜쥔 채 술을 마시는 한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 여인이 마시는 술이 키프로스 전통 디저트 와인인 ‘코만다리아(Commandaria)’라고 말한다.
코만다리아는 약 6000년 전부터 와인을 만들어 온 것으로 알려진 키프로스에서도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된 와인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디오니소스가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를 유혹하는 술로 묘사되기도 했고, 기원전 7세기 활동한 그리스 시인의 시에도 등장했다.
지난달 25일 코만다리아를 만드는 바실리아데스(Vassiliades) 와이너리를 찾았다. 와이너리는 키프로스 남부 리마솔에서도 오모도스(Omodos)라는 산간 마을에 자리했다. 도심에서 약 50㎞ 떨어진 탓에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달려서야 고급 리조트나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와이너리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이 와이너리는 오모도스 마을 출신 변호사이자 와인메이커 크리스토둘로스 바실리아데스(Christodoulos G. Vassiliades)가 가업을 이어받아 2017년 새롭게 문을 연 와이너리다. 역사는 짧지만, 키프로스 평균적인 와이너리의 연간 생산량(30만병)보다 많은 연간 50만병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바실리아데스 와이너리는 키프로스 최대 산맥인 트로도스(Troodos)산맥 중턱 경사진 넓은 포도밭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이 와이너리는 산 중턱에 있지만, 30여개 테이블이 마련된 레스토랑도 구비했다.
와이너리 직원 미하일 니키포로프는 “와이너리는 해발 고도 800m에 자리했고, 포도밭은 해발고도 800~1100m 사이에 있다”고 했다.
그는 포도밭 규모에 대해서는 “약 140헥타르(ha)로 12개의 다른 품종의 포도를 기르고 있다”며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포도밭이 우리 와이너리 소유”라고 설명했다.
니키포로프는 “와이너리는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춰 2017년에 문을 열었지만,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 이뤄졌다”면서 “지금의 모습은 10년간의 결과물”이라고 덧붙였다.
◇ 원료 산지부터 제조법까지 법으로 정해져… 생산량 많지 않아
니키포로프의 안내를 받으며 와인이 생산되는 지하로 내려가자 새콤한 포도향이 코를 찔렀다.
니키포로프는 커다란 은색 탱크들을 가리키며 “포도즙에 알코올을 만드는 발효 작업에 사용되는 탱크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와이너리에 이런 탱크가 70여개가 있다”면서 “여기 있는 탱크들로 코만다리아를 비롯해 레드나 화이트 와인도 만들고 있다”고도 했다.
열흘 이상 발효를 마친 와인들은 펌프를 통해 발효 탱크 절반만 한 크기의 안정화 탱크로 옮겨진다.
그는 “우리 안정화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은 청징제(술을 맑게 만들기 위한 첨가물)로 ‘젤라틴’ 대신 ‘벤토나이트’를 사용한다”며 “모든 와인에 동물성 재료 젤라틴을 사용하지 않고 비건 와인을 만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안정화 작업을 마친 와인들은 병입하거나, 오크통으로 옮겨져 보관고에서 숙성 과정을 거친다. 이곳 와이너리 보관고는 섭씨 14도에 습도 70%를 유지한다.
니키포로프는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병에 넣어 숙성하는 와인 코르크가 마르지 않도록 높은 습도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병들로 가득 찬 보관고에서 무거운 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니 오크통이 가득한 보관고가 나타났다. 니코포로프를 따라 들어선 보관고에는 달콤한 향이 가득했다. 그는 “이 향이 바로 코만다리아 향”이라고 했다.
보관고에는 225ℓ짜리 오크통 400여개가 4개 층으로 된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와이너리에서 판매하는 코만다리아 제품이 500㎖이니, 와인 약 18만병이 저장되어 있는 셈이다.
니코포로프는 “각각의 오크통은 300㎏이 넘지만, 보관한 와인 맛을 균일하게 만들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통을 굴려준다”고 했다.
프랑스 상파뉴 지역에서 난 포도만 사용해 만든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이라 부를 수 있듯, 코만다리아 와인이라는 이름을 달기 위해서는 리마솔 지역에서 생산한 포도만 사용해야 한다.
여기에 최소 2년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해야만 코만다리아 와인으로 팔 수 있다고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니코포로프는 “우리 와이너리에서는 2년을 넘어 3년 또는 5년 숙성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코만다리아 와인의 생산량은 많지 않다. 바실리아데스 와이너리에서 연간 생산되는 코만다리아는 약 5만ℓ로 이곳의 전체 와인 생산량의 약 20% 수준이다. 현재 약 12개 와이너리가 코만다리아를 만들지만, 이들 모두 손이 많이 가는 코만다리아 생산 비중은 크게 높지 않다.
◇ 건조시킨 포도로 만들어 달콤해… 시장규모 99위 국가의 주요 브랜드
이렇게 만들어지는 코만다리아는 어떤 맛일까. 니키포로프 안내를 따라 약 30분간 와이너리를 둘러본 끝에 코만다리아를 시음할 수 있었다.
붉은빛이 도는 캐러멜 색상이 가장 먼저 눈을 끌었다. 니코포로프는 “코만다리아 와인은 키프로스 토종 품종인 적포도 ‘마브로(Mavro)’와 백포도 ‘시니스테리(Xynisteri)’를 섞어 만든 뒤 5년간 오크통 숙성을 거치기 때문에 붉은 빛이 난다”고 설명했다.
코에 잔을 대자 오크통 보관함에서 났던 것과 같은 달콤한 향이 퍼졌다. 니키포로프는 “코만다리아 1ℓ에는 보통 잔당 200g이 들어있다”며 “포도가 완전히 익은 다음 수확해서, 햇빛에 말려 당분 비율을 높인 후 숙성 과정까지 거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맛은 흔히 ‘포트 와인’이라고 부르는 주정강화 와인과 비슷했다. 다만 코만다리아는 알코올 도수가 13도로 주정강화 와인(15~22도)보다 낮아 과실 향이 더 강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웠다.
니코포로프는 “키프로스 사람들에게 ‘코만다리아 맛이 포트 와인과 비슷하다’고 말하면 ‘그게 아니라 포트 와인이 코만다리아와 비슷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포트와인보다 코만다리아 역사가 훨씬 더 길다는 데서 나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키프로스 관광청에 따르면 코만다리아는 기원전 800년부터 ‘사이프러스의 나마(Cypriot Nam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코만다리아는 12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키프로스를 점령했던 세력이 부르던 이름이다. 당시 코만다리아를 주로 만들던 지역 이름 ‘라 그랑데 코만드리(La Grande Commanderie)’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키프로스에서 와인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과 규모는 크지 않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지난해 키프로스 와인 총생산량은 1만톤(t)으로 세계 99위 수준, 수출량은 431t 가량에 그쳤다.
그러나 코만다리아 역사가 긴 만큼, 키프로스가 자랑하는 주요 와인 브랜드들 간판 상품은 코만다리아로 나타났다. 지난해 키프로스가 수출한 와인 가운데 대부분이 케오(Keo)와 에트코(Etko) 같은 대형 와이너리가 만든 코만다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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