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호주는 금리동결, 유럽은 빅스텝… ‘물가 VS 경기’ 고민 깊어진 중앙은행들
“SVB 사태로 물가·경기 상충 관계 심화”
지난해까지 미국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 사이클(기조)을 그대로 따라갔던 주요국이 각자 경제 상황에 맞춰 독자적인 통화정책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금융불안이 고조되면서 물가안정과 경기·금융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중앙은행의 고민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16일 금융시장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이달까지 2회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한 데 이어 주요 7개국(G7) 중 처음으로 금리 인상을 멈춘 캐나다 중앙은행도 2회 연속 금리를 현 수준에서 묶어두기로 했다. 최근 호주 중앙은행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는 등 주요국이 그간 물가 안정을 위해 바짝 당겼던 긴축 고삐를 늦추는 모습이다.
반대로 뉴질랜드 중앙은행은 “고물가 억제가 시급하다”면서 이달 초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p)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같은 이유로 지난달 금리를 0.5%p 인상했다.
◇ “미국 안 따라간다”…경기 침체 조짐에 금리 동결하는 각국 중앙은행
캐나다 중앙은행은 지난 12일(현지시각) 열린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4.5%로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지난달에 이어 2회 연속 금리 동결이다. 캐나다 중앙은행은 “물가상승률이 점차 둔화하고 있고, 연내 3%대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그간 금리 인상의 영향으로 가계의 이자상환 부담이 커지면서 올해 소비 회복세는 약해지고, 연간 경제 성장률은 1.4%로 부진한 흐름을 보일 것으로 전망한다”고 했다.
앞서 한국은행도 지난 11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연 3.5%로 유지했다. 수출 부진, 민간 소비 둔화에 SVB발(發) 금융불안까지 더해져 경기가 가라앉을 위험이 높아진 상황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다. 호주 중앙은행(RBA)도 지난 4일(현지시각) 기준금리를 연 3.6%로 동결하면서 금리 인상 행진을 중단했다. RBA는 “최근 미국과 스위스에서 불거진 은행 위기로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졌다”면서 일단 금리 인상을 멈추고 통화정책을 재점검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캐나다 중앙은행과 한국은행, RBA 모두 SVB 사태로 경기 불확실성이 커진 점을 금리 동결의 주된 근거로 지목했다. 물가가 완전히 꺾이진 않았지만, 여기서 금리를 더 올리면 경기가 급격하게 나빠지거나 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질 수 있기 때문에 동결 기조로 전환한 것이다. 물가보다 경기에 초점을 맞춘 금리 결정으로 해석된다.
반면 뉴질랜드 중앙은행(RBNZ)은 지난 5일(현지시각)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높고 지속적”이라면서 빅스텝을 단행했다. RBNZ는 이번까지 11회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해 연 5.25%로 끌어올렸다. 경기 침체 우려가 커졌음에도 ‘물가 안정’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4분기 기준 뉴질랜드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7.2%까지 치솟았다.
ECB도 지난달 SVB 파산과 스위스 크레디트스위스(CS) 유동성 위기로 금융시장 혼란이 커진 상황에서도 6회 연속 금리 인상 행보를 이어갔다. 기준금리는 연 3.5%로 0.5%p 높아졌다. 당시 크리스틴 라가드르 ECB 총재는 “인플레이션이 지나치게 오랜 기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금리 인상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주요국의 금리 결정이 엇갈리고 있는 배경에 대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작년에는 미국이 금리를 빠른 속도로 올리면서 전 세계가 그 흐름에 맞추는 통화정책을 펼쳤지만, SVB 사태로 그런 기대가 많이 누그러졌다”며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조금 더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국가마다 경제 체력은 물론 물가상승 둔화 속도와 고용시장 상황, 올해 성장률 전망 등이 다 다르기 때문에 중앙은행 통화정책도 1년 만에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설명이다.
실제 인도네시아, 브라질, 말레이시아 등 금리를 미국보다 큰 폭으로 인상했던 신흥국 중앙은행도 금리 인상을 중단했고 베트남은 지난달 금리 인하에 돌입했다. 전 세계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피벗(pivot·통화정책 전환)’에 나선 것이다. 이 총재는 고물가·고금리에 SVB발 은행 위기라는 불확실성까지 추가되면서 “(중앙은행의) 물가 안정 목표와 금융 안정 목표의 상충관계가 더 심화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했다.
◇ 시장 “연준도 5월 금리 한 차례만 더 올린다…내년부터 금리 인하”
미국과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도 올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에서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역시 조만간 금리 인상을 종료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앞으로 더 많은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동결하거나 연내 금리 인하를 시작할 것으로 보고 있다.
블룸버그 산하 경제 연구소인 블룸버그이코노믹스는 전 세계 경제의 90%를 차지하는 23국 중앙은행 중 20곳이 연내 금리 인상을 중단하고 내년부터 금리를 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시장에서는 연준이 5월 기준금리 0.25%p 인상을 마지막으로 연말까지 금리를 동결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주요 투자은행이 예측하는 미국 최종금리 상단은 5.25%인데, 현재 수준(5.0%)보다 0.25%p 높은 데 그친다. 미국의 물가 둔화 흐름이 지속되고 있고, 하반기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커진 점이 이런 전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미국의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5%를 기록해 전월(6.0%)보다 큰 폭 하락했다. 전문가 예상치(5.2%)도 밑돌았다. 변동성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이 여전히 5.6%로 높은 수준이지만, 시장은 헤드라인 물가(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가 9개월 연속 둔화 흐름을 이어간 사실에 더 주목했다.
연준 내부에서 경기 침체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금리 동결론을 지지하는 요인이다. 연준이 공개한 3월 FOMC 의사록을 보면 일부 회의 참석자들은 SVB 파산이 촉발한 은행 위기가 경제에 미칠 영향을 언급하면서 “미국 경제가 올해 하반기부터 완만한 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일부 참석자들은 잠정적으로 금리 인상을 중단하는 게 적절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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