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포물선은 내려가기만 할까…진짜 나를 만나는 변곡점
노년의 성장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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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첫해 가을이었습니다. 15년 미국 생활 때처럼 가족과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추수감사절이 휴일이 아니기에 회사에 나왔는데 마침 그날 저녁 중요한 임원회의가 갑자기 잡혔습니다. 저는 고민이 됐습니다. 회사로 온 첫해였고 회사에 대한 내 헌신성이 시험받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샌드위치를 먹으며 회의를 마친 뒤, 밤늦게 집으로 갔습니다. 식구들이 실망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식구들은 이해한다고 했지만 삶의 우선순위가 갑자기 바뀐 것 같은 남편과 아빠를 보면서 당혹스러워하고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내 마음도 어두워졌습니다. 요즘 같으면 하지 않을 결정이었지요. 가족에게 양해를 구할 일이 아니라 회사에 양해를 구했어야 할 일이었지요. 27년 전 대기업의 임원 생활은 그러했습니다. 두고두고 종종 미안해했던 기억입니다.
또 다른 일화입니다. 한번은 미국 뉴욕으로 출장을 갔는데 일정이 너무 빡빡해 뉴욕에 살던 딸과 따로 시간을 갖기 어려웠습니다. 도착한 다음날 점심 회의가 있었습니다. 마침 그다음 일정 사이에 잠시 시간을 낼 수 있어서 딸에게 그 레스토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딸은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딸은 짧은 시간 얘기를 나누고 돌아가면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저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힘들게 일정을 쪼개서 시간을 냈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가버리다니요. 저는 딸이 괘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딸이 느낀 서운함을 당시에는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와 제가 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습니다. 네, 철저히 시간을 약속하는 일상과 24시간 긴장한 상태에서 저도 모르게 가족들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게 제 자신도 아프게 했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요.
죄책감이 위로로 변하다
최근에 제 40~50대를 돌아보다가 이런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전에는 식구들을 실망시켰던 것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했다는 외로움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요구한 회사 분위기에 반감도 생겼지요. 그런데 이번엔 처음으로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뜻밖에, 전혀 예상치 못한 감정이었습니다. 당시의 저를 생각하니 너무 불쌍하고 가슴이 아픈 거예요. “그걸 다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그래, 너 정말 애썼다. 안팎으로 살아남느라 참 수고 많았다”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걸 느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나 자신을 위로하는 무언가가 저절로 작동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참으로 편안해졌습니다. ‘나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과거에 가족과 타인과 회사로 향했던 돌봄을 내게 돌려서 나의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몸과 마음이 어떠한지 관심을 갖고, 나의 안과 밖에 놓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밖으로 치닫던 내 생각을 안으로 돌려야 하는 것 같습니다. 돈·권력·명예 등 사회적 성취를 위한 노력 강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레 되는 부분도 있고 또 약간의 성찰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은퇴와 노화를 겪으면서 좋고 싫고를 떠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먼저 체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12시간씩 동계 산행을 한다는 건 다 지나간 아득한 과거의 일입니다. 또 내가 현직에서 치열하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살면서 자동으로 따라왔던 사회적 인정과 예우도 다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은퇴와 노화의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년에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쨍쨍함을 과시하는 노익장은 멋지기도 하고, 또 사실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건강한 불편함을 회피하는 뉴로시스(신경증)의 일종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이가 60이면 이 정도, 70이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요구하는 획일적 기준은 실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릅니다. 나의 개별성이 무시될 때 나는 자유를 잃습니다. 그리고 개별성의 끝까지 가면 보편성을 만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보편성이라는 것은 아마도 삶의 진실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포물선에서 시작될 변곡점
저는 느리게, 조용히, 그리고 심심하게 지내면서 제 자신을 돌보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약속을 많이 잡지 않습니다. 나를 드러내려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내가 도움이 된다면 능력껏 돕습니다. 노화의 과정에서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기 위해서 근력강화훈련을 합니다. 그리고 과거 현직에서 일할 때 아웃소싱했던 일상을 다시 인소싱하고 있습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장을 보고 밥을 챙겨 먹고 설거지를 합니다. 일상을 챙기면서 다시 두 발을 땅에 딛고 삽니다.
은퇴와 노화를 겪으면서 남이 만들어 놓거나 사회가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보다는 나의 삶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관계맺기에 마음이 열렸습니다.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진정한 관계맺기는 나와 나 자신의 새로운 관계맺기, 즉 ‘나 자신을 돌보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나는 나 자신과 또 남과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 새로운 성장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외적 성장, 양적 성장과는 다른 나만의 특별한 내적 성장입니다. 전에는 노년을 꼭짓점을 지나 떨어지는 포물선, 내려가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포물선은 분명 그대로 존재하지만, 또 다른 곡선, 변곡점을 만들어내고 다시 상승하는 곡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년의 성장곡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신을 돌보는 나를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옆집 마당 살구나무 꽃송이 사이를 아기 새들이 짹짹대며 뛰어다니느라 바쁩니다. 살구꽃 송이들이 흩어지며 바람 타고 내려와 마당에 꽃수를 놓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집요하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은퇴 뒤 삶의 방향은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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