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예견한 김혜수, 뱅크런은 막지 못했다[씬(scene)나는 경제]

이명철 2023. 4. 1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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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 부도의 날’ 외환위기 때 급박한 경제 상황 담아
인터넷은행·상호금융·저축은행 등 부실 현실화 소문 나돌아
이창용 “한국, SVB보다 100배 빠를 것”…불안감 차단 시급

[이데일리 이명철 기자] 영화 속 장면 곳곳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담겨있습니다. 씬(Scene)을 통해 보이는 경제·금융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봅니다. [편집자주]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이 노출될 수 있습니다.

한국은행에 근무 중인 한시현(김혜수)은 한국의 불안한 경제에 대해 보고서를 제출하고 백방으로 움직이지만 결국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만다. (사진=CJ ENM)
“30대 기업 중 3곳, 100대 기업 중에서는 20곳이 도산했고 협력업체를 포함하면 200여개 업체가 도산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아 채권단이 법정관리를 시작했다는 뉴스를 배경으로 한국은행 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합니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은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을 다뤘습니다. 미리 외환위기를 예견한 한시현(김혜수)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위기를 이용해 큰 이익을 거두는 윤학진(유아인)을 중심으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줍니다.

외국인 투자금 회수, 기업 유동성 위기가 금융까지

외환보유고의 급감 등 한국 경제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한시현은 시중은행들과 기업들을 다닌 결과 예삿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결국 당시 1위 기업인 대우그룹의 부도를 기점으로 경제는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직접 겪은 외환위기의 과정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개봉 당시 실제 외환위기가 벌어졌던 상황을 다르게 묘사했다며 비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일단 재정국 차관이 재벌들과 결탁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대표적입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실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픽션(허구)이 가미됐다는 점을 알아야 하겠죠. 영화에서는 외환위기가 발생한 원인에 대해 외국인들이 국내 투자금을 회수하는 가운데 기업들의 무분별한 대출 확장과 은행의 안일한 심사 때문이라고 지목합니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도록 한 원흉으로 지목되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이면엔 재벌과의 결탁이 있다고 영화는 의혹을 제기한다. (사진=CJ ENM)
한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유동성 악화가 불거지고 부실채권의 규모가 늘어나자 결국 금융회사들이 도산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경제 위기가 불거졌던 동남아의 여파도 큽니다. 영화에서 한은 직원은 “종금사들이 저리에 가져온 동남아 채권 중심으로 환수가 시작돼 종금사가 망하면 종금사가 보유한 시중은행 어음이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시중은행 부도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합니다. 동남아 채권에 투자한 종금사의 부실이 시중은행으로 연쇄 발생할 수 있던 말입니다.

영화는 위기가 현실화하는 모습을 크게 두 가지의 장면으로 표현합니다. 김혜수의 오빠인 갑수(허준호)는 작은 제조기업을 운영하는데 납품을 하려던 미도파의 부도로 공장과 집이 빼앗길 위험에 처합니다.

두 번째 장면은 고려종합금융의 아수라장입니다. 채권 투자 손실을 입은 고려종금이 부도 위기에 처하자 고객들은 창구로 몰려가 예치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미 갚을 돈이 없는 고려종금이 돌려줄 돈은 없겠죠.

모두가 망한건 아니었습니다. 종금사에 근무하던 윤학진은 달러 매입, 옵션 투자 등을 통해 떼돈을 법니다. 위기가 현실화한 이후 집값이 크게 떨어지자 부동산에 투자하기도 하는 민첩한 움직임을 보여주죠.

스마트폰으로 간단 처리, 창구 찾을 필요 없다

만약 지금도 금융회사들의 부도 위기감이 커질 경우 영화 속 고려종금 객장처럼 투자자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난장판이 펼쳐질까요? 금융권 관계자들은 그런 모습은 보기 힘들 거라고 합니다.

1990년대와 달리 지금은 웬만한 금융 업무를 스마트폰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고객들은 당장 은행 등 금융회사 창구에 찾아가기보다는 모바일 뱅킹으로 신속히 투자금을 먼저 빼겠죠.

지난달 미국에서 발생한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를 보면 이런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SVB는 자금 대부분을 채권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는데 이를 알게 된 고객들이 재빨리 돈을 빼내는 일명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이 발생해 도산하게 됩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SVB 위기가 발생한 지난달 9일 인출액은 420억달러, 한국 돈으로 54조원대에 달했습니다. 이후 10일 고객들이 인출하려고 했던 예금액은 1000억달러(약 130조원)으로 이틀간 184조원 가량의 인출 시도가 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위기를 감지하고 돈을 벌 계획에 돌입하는 윤학진(유아인). 큰 이익을 거두지만 반대로는 씁쓸함을 느끼는 인물로 묘사된다. 다만 최근 현실에서는 사회면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사진=CJ ENM)
최근 금융 시장이 불안정하다 보니 국내도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실제 SVB 사태 이후 토스뱅크, 새마을금고, OK저축은행·웰컴저축은행이 잇따라 대규모 부실이 발생해 뱅크런이 있다는 ‘지라시’ 형태의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각사들은 부실이 현실화하지도 않았고 뱅크런 사태도 없다며 소문 진화에 나섰습니다. 저축은행들은 경찰에 고발 조치하는 등 강력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소문이 돌자 일부 고객들은 실제로 돈을 인출했다는 제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예금 인출은 어렵지 않습니다. 모바일 앱을 통해 해당 금융회사에 있는 예금을 다른 은행으로 옮기려면 몇분이 걸리지도 않죠. 근거 없는 소문에 금융회사들이 긴급 대응에 나서는 것도 이처럼 뱅크런이 순식간에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최근 “한국은 젊은이들 중심으로 디지털뱅킹이 훨씬 더 보급된 상태”라며 “SVB와 유사한 사태가 한국에서 벌어진다면 아마도 미국보다 100배 빠르게 예금이 인출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과 대외신인도는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도 되지 않게 탄탄합니다. 선진국 경제로 발돋움하려는 한국이 다시 구제금융을 받는 일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겠죠.

다만 금융시장의 안정뿐 아니라 심리적인 불안을 잠재우는 대책은 시급해 보입니다. 공포감은 언제든 급속도로 확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포를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들도 강력히 차단해야 하겠습니다.

[영화 평점 3.5점, 경제 평점 4.0점(5점 만점)]

영화 ‘국가 부도의 날’ 포스터. (사진=CJ ENM)

이명철 (twomc@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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