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참 찌질했던 그 연애 '사랑의 고고학'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2023. 4. 1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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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안 사귀는 사람이랑 자봤어? 몇 명? (…) 그러면 사귀는 중에 다른 사람이랑 잔 적 있어?”

남배우의 끝없이 이어지는 추궁 대사에 인내심이 한계를 보일 때쯤 다행히 여배우가 “그만 좀 해, 오늘만 벌써 9번째야”라고 받아쳤다. 12일 개봉한 연애물 '사랑의 고고학'은 연인이 사랑을 시작하고 끝맺는 수년간의 시간 동안 벌어지는 너저분하고 때로 폭력적이까지 한 시간을 고증하듯 구현한 작품이다. 격앙된 감정신은 없지만 조분조분 내뱉는 대사와 미묘한 표정 변화, 공기의 분위기 등이 맞물려 '이런저런 연애 좀 해봤다' 싶은 관객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몇몇 장면을 만나게 된다.

▲ 영화 '사랑의 고고학' 스틸컷.

연인을 향한 심리적 학대에 가까운 질문을 마구 쏟아내는 남자 인식(기윤)의 명분은 '나이'다. 자신은 곧 40대가 되기 때문에 소위 '자유로운 영혼'과 연애하다가 상처받고 시간만 낭비하는 위험을 지는 건 싫다는 것이다. 고작 몇 년 차이로 앞자리 3과 4가 다른 상황일 뿐인 극 중 설정상 영 듣기에 궁색한 핑계인 데다가, 질문하는 그 자신도 '안 사귀는 사람이랑 자본적 있는' 남자라는 점에서 그다지 설득력은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심판자를 자처하며 집요하게 질문을 해대는 남자의 공격적인 태도에 주눅이 들어버린 영실(옥자연)은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떨구고 만다.

말만 들어도 이 관계를 눈에 그리듯 상상할 수 있는 즈음의 독자라면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만, 남자의 행동은 상대와 관계를 돈독히 다지기 위한 '건강한 알아가기'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도리어 상대에 대한 일종의 '지배력 행사'에 가깝다. 비슷한 도덕 기준으로 살아온 자신의 과거는 아랑곳없이, 애매한 명분을 들어 상대의 지난 일만을 고집스럽게 캐묻고 질책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심리적으로 죄스럽게 만들거나 부끄러움을 느끼게끔 몰아가면서 약자 위치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에 질린 여자가 관계를 정리하고 떠나려고 하면 엄청나게 후회한다는 듯 무릎을 꿇고 붙잡는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다.

▲ 영화 '사랑의 고고학' 스틸컷.

'사랑의 고고학'은 무려 8년 동안 그런 연애를 지속한 주인공 영실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고고학을 전공한 그는 극 초반 학생들에게 “고고학은 과거의 유물을 통해서 사람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데, 마치 이 영화가 지나간 연애의 기록을 뜯어보고 곱씹어보면서 사랑의 본질을 추적하는 작품임을 비견해 예고하는 듯하다. 공교롭게도 상대를 향한 달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설렘의 시간은 짧고, 감정이 변질되고 관계가 몰락하는 과정은 지리멸렬할 정도로 길다. 이 과정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는 거의 헤어진 관계나 다름없는 영실을 집으로 부른 인식이 “(우리 관계를) 규정하지 않고 지내면 안 돼?”라고 말하며 진한 스킨십을 시도하는 대목이다.

고구마 500개쯤 먹은 것 같은 대응으로 일관하는 영실이 영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연출을 맡은 이완민 감독은 남의 연애사는 냉철하게 분별하면서도 정작 자기 일 앞에서는 사리 판단이 흐려지는 우매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는 듯, 보기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변질된 관계의 겹겹 시간을 자세히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일 뿐이다. 관객이 '이게 과연 사랑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된다면 바로 감독의 그 집요함 덕분일 것이다.

▲ 영화 '사랑의 고고학' 포스터.

영화는 영실이 어떻게 그 시간을 극복해 나가는지 까지는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또 다른 연애 상대를 찾아 관계를 건강하게 가꾸는 단계로까지 넘어가는 것은 각자의 인생관과 연애 경험을 토대로 풀어나가야 하는 숙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고고학'은 그저 관객이 지난 연애의 어떤 순간을 돌이키게 하면서, 과연 어떤 경험이 가장 온전한 사랑에 가까웠는지 혹은 그렇지 않았는지를 곱씹게 유도한다. 돌이키면 사람의 본질을 찾기 위해 유적지의 흙을 소중히 발라내던 영실의 모습이, 사랑의 본질을 알고 싶어 관계의 형성과 몰락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감독의 태도와도 묘하게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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