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미국 가짜뉴스 만들고 군경 작전 벌여 주민 1만 4천여 명 살해돼
[한미관계 탐구 (14)] 미국의 제주43 개입과 친일 경찰 등의 양민학살 (01)
[미디어오늘 고승우 민언련 고문·언론사회학 박사]
제주 4·3의 진상은 미군 비밀자료 등에서 확인된 미국의 군사적 개입, 친일경찰과 군인들의 양민학살 등에 대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공개한 관련 자료 등을 통해 그 전모의 일부가 드러났는데 이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제주 4·3의 발생 원인의 하나로 미국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추진 반대가 손꼽힌다. 따라서 제주 4·3을 다루기 위해서는 미국의 유엔을 통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추진에 대한 설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미국은 소련과 협의하던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한국문제를 1947년 9월23일 유엔총회 본회에 제기해 안건으로 채택되게 만들었다. 미국은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한국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유엔감시 하에 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 후, 정부수립을 제의했다.
미소,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로 대치 미국의 압승으로 결론
미국은 동시에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 그리고 총선 및 양군 철수 등에 대한 감시협의체로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설치할 것도 추진했다. 이에 대해 소련은 미국 측 제안에 반대하면서 한국인 스스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미·소 양군 동시 철군 및 본 문제 토의에 남북한 대표를 참가시키는 내용으로 하는 반대결의안을 제출했다.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선(先)정부수립·후(後)외국군철수를 주장한 미국과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소련이 날카롭게 대립하였으며, 1947년 10월28일 부터 11월5일까지 이 양 결의안을 놓고 토의한 결과 소련의 반대결의안을 부결시키는 대신 미국 측의 제안을 채택했다.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11월 14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측 안을 40:0(기권 6)이라는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함으로써 모스크바협정이 규정한 5개년 신탁통치안이 묵살되었다(Oliver, Robert Tarbell (1978).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A Personal Narrative. Seoul, South Korea: Panmun Book Company. p. 149. OCLC 568651495).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화민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소련 등 9개국 대표로 발족시켰지만 우크라이나와 소련은 불참했다. 소련 측은 조선인대표의 참가 없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에 참가하기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서울에서 임무에 착수 했으나 위원단의 북한 입장이 소련군정당국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8개국의 대표로 구성된 임시위원단이 남한에 입국하였으나 소련군 점령 하의 북한 지역에는 들어가 못하게 되자 그 사실을 유엔 소총회에 보고했다. 이에 대해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동 위원단이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그 과업을 계속 할 것을 결정했다(https://ko.wikipedia.org/wiki/).
“유엔은 소련 등 7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을 하겠다는 미국의 안을 따른다.”
그에 따라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가 치러지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남한에서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북한에서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출범했다. 1948년 12월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한 지역에서 실시된 선거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미국 제주 4·3 발생하자 미국 주도 5·10 선거 의식해 초기부터 강경 진압
미국이 남한에 대한 정책 변경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추진에 반대하는 운동이 남한 전역에서 벌어지면서 1948년 5·10 선거를 한 달 여 앞 둔 4월3일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미국의 점령 정책이 군정 통치로 집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제주 43은 미국식 정권을 남한에 수립해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자 했던 시도에 대한 조직적인 항거였다(John Kie-Chiang Oh, Korean Politics: The Quest for Democratization and Economic Development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ISBN 0801434475).
제주 4·3은 한국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만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만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했다. 이런 참극은 미군사고문단들이 참관한 가운데 자행되었고 미군은 학살 현장을 기록했지만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취했다(The National Committee for the Truth About the Jeju April 3 Incident, Truth-Finding Efforts and Recommendations. Retrieved November 18, 2007).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이덕구는 6월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은 그해 6월말 9월의 해주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가지만 학살은 1953년7월 27일 한국 전쟁이 휴전된 후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제주 4·3 발생 후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고 이어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14연대 군인들은 여수를 점령한 뒤 순천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전라남도 일대를 점령했다. 초기 진압작전에서 반란군에 밀린 이승만 정부는 10월 20일 열린 미국 군사고문단 수뇌부가 참석한 긴급회의에서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해 미군이 주도하기로 결정했고 21일,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발효했다("Cheju-do Rebellion".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2: 139197. doi:10.1353/jks.1980.0004. S2CID 143130387).
정부군은 25일 장갑차와 박격포, 항공기, 경비정 등을 동원해 여수를 포위해나갔고, 27일 진압에 성공했다. 여수를 빠져나간 반란군은 지리산 인근으로 흩어져 11월부터 1950년 초까지 게릴라로 활동했다. 이 사건 진압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확인된 사망자는 3,400여 명으로 밝혀졌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5a2949a. '여수·순천 10·19사건').
제주 4·3은 2차 대전 종전 후에 전승국의 점령에 대해 강력한 저항이 발생해 장기간의 무장투쟁으로 비화한 것으로 남한의 제주도가 유일했다. 미국 정부의 지침을 받는 미군정은 제주 4·3이 발생하자 종래의 남한 정책에 따라 소련의 공산주의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강력한 진압작전을 폈다. 미군정의 통제 하에 남한 국방수비대와 경찰, 우익단체가 앞장서서 벌인 토벌작전의 대가는 컸다.
많은 제주도민은 교전 중 사망한 것이 아닌 집단 학살이라는 형식 속에 참변을 당했다. 미군정은 살해 현장에서 직접 개입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 숨는 식으로 지휘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분명했다. 소련의 공산주의 영향력이 남한에까지 확산되는 것을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 목적을 위해 군사작전을 전개했고 그 과정에서 내놓은 제주 4·3에 대한 원인 분석이나 대처 방식은 가짜뉴스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제가 심각했다. 미국은 난데없이 소련 개입설 등을 유포하면서 집단학살 사태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Merrill, John (1980). "Cheju-do Rebellion".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2: 139197. doi:10.1353/jks.1980.0004. S2CID 143130387).
미국은 미군정 체제에서 발생한 제주 4·3에 대해 소련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다면서 대량 학살이 발생토록 유도했다. 미국은 남한정부가 수립된 뒤 실시한 미군 철수 후에는 미 군사고문단을 남겨 한국군이나 경찰을 지휘하게 했다. 미국은 6·25 전쟁이 발생한 직후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넘겨받아 전쟁을 총지휘했다. 따라서 미 군정과 6·25 전쟁 기간 동안 발생한 한국군경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미국이 직접 책임이 있는 것이다.
6·25 전쟁 발발 직후 한국군은 전국의 좌익세력에 대한 예비검속을 지시하고 각자의 안보에 미치는 위해 요인에 따라 A, B, C, D 등급으로 분류했다. 그 해 8월30일 한국 해군 정보장교는 제주 경찰에 전문을 보내 긴급지시를 내렸다(George Wehrfritz, B.J. Lee, Hideko Takayama, Ghosts of Cheju, Newsweek. Retrieved November 18, 2007).
“9월6일 이전에 c, d 그룹을 전원 총살하라”
제주 4·3배경, 단정 수립 반대, 서북청년단 등에 대한 제주도민 반감 등 복합적
제주 4·3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로 초래된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의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제주 4·3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반공단체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되어 발생한 쌍방간의 적개심 등을 들 수 있다(Cumings, Bruce (2001). "The Question of American Responsibility for the Suppression of the Jejudo Uprising". In Hur, Sang Soo (ed.). For the Truth and Reparations: Jeju April 3rd of 1948 Massacre not Forgotten. BaekSan Publisher.[page needed]).
제주도는 광복 후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 군정청과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1947년 제주 북초등학교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 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지은 뒤 3·1절 기념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Merrill, John (1980). "Cheju-do Rebellion".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2: 139197. doi:10.1353/jks.1980.0004. S2CID 143130387).
한편 경무부에서는 3만여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 발포했다고 해명하면서 민심이 들끓었다. 이에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3월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동참했다. 경찰은 3월15일부터 파업 관련자 검거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3월17일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또 다시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4월10일까지 500명가량을 검거하였는데 그 가운데 포함됐던 66명의 경찰이 파면되었고 그 자리는 서북청년단 소속으로 충원됨으로써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 커져 갔다.
제주 4·3의 발단의 명분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운다는 것으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제주도에 파견되어 행패가 심했던 우익단체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공포가 합해져 양 측의 대립은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Kim, Hun Joon (2014). The Massacre at Mt. Halla: Sixty Years of Truth Seeking in South Korea. Cornell University Press. pp. 1341. ISBN 9780801452390).
미 군정 조사단 제주도에 파견, 제주 도민 70% 좌익 동조자로 기술
미군정은 1947년 3월 제주도에서 경찰 발포 사건에 항의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총파업이 시작되자 카스티어(Casteel)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다.
미군 보고서는 파업원인을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고 분석했다. 또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했다. 한술 더 떠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까지 했다.
카스티어 대령이 제주를 떠난 다음날인 3월14일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 421명이 급파됐다(당시 제주경찰은 330명). 조병옥은 15일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틀 새 200명이 연행됐다.
이후 본토에서 파견된 수사요원들에 의해 연행자에 대한 고문이 시작되고 1947년 4월 중순께 검속자가 500명으로 늘어났다. 수감자들은 유치장 안이 비좁아 앉지도 못한 채 서서 수감생활을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에 대해 미군 감찰보고서는 “10×12피트(약 3.3평)의 한 방에 35명이 수감됐다”고 기록했다.
중문 발포사건(3월17일), 종달리 6·6사건(6월6일), 북촌 발포사건(8월13일)과 1948년 2·7사건 등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잦아지면서 검속자들은 계속 늘어났다. 3·1 발포사건 이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검속자가 무려 2500명에 이르렀다(1947년 12월13일자 미군 CIC 보고서).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무장대는 무장봉기가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임을 주장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삐라의 구호가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이라는 구호를 통해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무장대는 4월3일부터 경찰과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원을 지목해 살해했다. 5·10선거를 전후한 시기에는 선거 관련자를 집중 공격했다. 무장대는 이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인사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학살했다.
미군, 우익청년단원이 자행한 방화'오라리 방화'를 무장대가 저지른 것처럼 편집
딘 군정장관은 4월17일 경비대 제9연대가 진압작전에 나설 것을 명령하면서 맨스필드 중령에게 “대규모 공격에 앞서 항복을 유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맨스필드는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에게 무장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제9연대장은 4월22일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전단지를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다. 그 결과 4월28일 마침내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에 평화협상이 성사됐다.
평화협상 결과는 ①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한다 ②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토대로 평화협상 제안하는 제9연대장의 전단지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우리는 과거 반삭(半朔) 동안에 걸친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국방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을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하한 방법으로든지 제시하여주기 바란다.
1948년 4월22일 제9연대장 육군중령 김익렬
전투 중지 사흘 만인 5월1일 대낮에 제주읍 오라리에 괴청년들이 들이닥쳐 민가에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폭도의 소행”이라고 몰고 갔으나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청년단원들이 자행한 방화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미군 방첩대(CIC)는 김익렬 연대장의 보고를 묵살한 채 “폭도의 소행”이라는 경찰의 주장만 받아들였다. 김 연대장은 방화 주동자를 체포감금하는 등 평화협상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평화협상은 결국 무산되었다.
미군은 불타는 오라리의 모습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상과 상공에서 촬영했고, 각종 동영상 필름을 덧붙여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무성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마치 '오라리 방화'가 무장대가 저지른 것처럼 편집되어 있었다.
딘 군정장관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 열어
1948년 5월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제주 주둔 제59군정중대장인 맨스필드, 제주도지사 유해진, 제9연대장 김익렬,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 딘 장관 전속통역관 등 모두 9명이 참석했다.
당시 조병옥 경무부장은 43사건을 '계획된 공산폭동'으로 규정하며 강경작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익렬 연대장은 입산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경찰의 실책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키고 무력위압과 선무공작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조병옥과 몸싸움을 벌였다. 미군정은 군경수뇌부 회의 다음날인 5월 6일, 그동안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하고 후임에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510선거를 반대하는 유혈 사태가 전국적으로 줄을 이어 발생하고 좌파 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김구, 김규식 등 우익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까지 선거 반대에 나서는 가운데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한 무장봉기가 제주도에서 벌어지자 미군정은 크게 긴장했다.
무장대는 510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선거 당일 마을에서는 경찰가족이나 우익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민들은 산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돌아왔다.
1948년 5월10일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된 선거 결과, 제주도는 남제주군과 제주읍내를 제외하고 대부분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다. 남제주군 선거구에서는 무소속 오용국 후보가 당선됐으나,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군정은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에 대해 선거무효를 선언하며 재선거를 명령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재선거마저 무기한 연기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되자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Brown)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하도록 했다.
브라운 대령은 당시 사태가 억압 때문에 민심이 폭발한 것이므로 그 원인을 치유하라는 여론이 높았으나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이라며 강경 진압 작전을 본격화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브라운 대령은 “계획대로만 간다면 2주일이면 평정될 것”이라면서 경찰은 해안에서 4㎞까지 지역의 치안을 확보하고, 경비대는 제주도 서쪽부터 동쪽까지 빗자루로 쓸 듯 휩쓸어버리는 작전을 펴고, 해안경비대는 제주 해안을 봉쇄하도록 각각 역할을 분담시켰다.
박진경 신임 연대장은 미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강경작전을 벌였다. 미군 보고서는 대대적인 체포 작전의 전과에 대해 “6주간 4천 명을 체포했다”고 기록했다. 미군정은 경비대의 이 체포 작전을 '성공적 작전'으로 평가하면서 제주에 부임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1948년 6월18일 새벽, 박진경 연대장이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부하의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이 암살사건 연루 혐의를 받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가 총살됐다.
이승만 정권 수립이후 발생한 제주43학살극은 제9연대장 송요찬이 1948년 10월 17일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 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포하면서 예고됐고,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본격화됐다. 그 포고령 내용은 아래와 같다.
포고령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1948년 10월17일 / 제주도주둔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
미군 비밀보고서 “제9연대 대량학살계획 채택했다”고 기록
경비대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협조하고 있다며 중산간마을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이 작전에 대해 미군 비밀보고서는 “제9연대가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공공연하게 게릴라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 제9연대가 점령했던 기간 동안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발생했다.
서귀포경찰서장을 역임했던 김호겸은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행위에 대해 “서청은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 후 보고서에는 '현장 답사 차 갔는데 도주, 정지명령에도 불구 계속 도주,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다”고 증언했다.
1948년 11월15일, 군인들은 가시리에 들이닥쳐 마구 총을 쏘아댄 뒤 소개령을 내렸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해변마을인 표선리로 소개돼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됐다. 12월22일 토벌대는 호적을 대조하며 '도피자 가족' 76명을 속칭 '버들못'에서 학살했다.
서청 출신의 삼양지서 주임은 “하루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학살을 일삼던 제9연대 정보과장은 매일 모르핀을 맞아야 하는 마약 중독자였다. 당시는 이런 자들이 제주도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무장대는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벌어지자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마을을 습격했다. 이 때 남원리·위미리·성읍리·세화리 주민들이 크게 희생당했다. 이 같은 행위는 향후 주민들과 무장대를 갈라놓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무장대가 궤멸 상태에 놓인 이후에는 굶주림에 처한 잔여 무장대원이 식량을 약탈하러 마을로 들어갔다가 보초 서던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고, 세력 확보를 위해 젊은이들을 납치하는 사례도 종종 발생했다.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토벌대 명령에 따라 해변마을로 소개했지만 토벌대의 학살극이 그치지 않자 다시 한라산으로 피신했다. 당초 소개 작전의 목적은 무장대와 일반 주민을 분리시킨다는 것이었는데, 토벌대의 무분별한 행동은 오히려 주민들을 산 쪽으로 쫓아내는 결과를 빚었다.
남편이 어디론가 사라져 '도피자 가족'이 된 부인은 늙은 시부모와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눈 덮인 한라산으로 향했다. 토벌대의 총부리에서는 벗어났지만 피난생활은 너무나 처절했다. 겨울철 한라산에는 살을 에는 추위만 있을 뿐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피난민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1948년 12월 말, 경비대 총사령부는 대전 주둔 제2연대와 제주 주둔 제9연대를 맞교대시켰다. 제9연대장 송요찬과 마찬가지로 제2연대장 함병선도 일본군 지원병 준위 출신이었다. 제2연대는 여순사건 때 전투경험을 했고, 특히 제3대대는 서북청년회 출신으로만 구성됐다.
1949년 1월 군인 2명이 북촌리 인근에서 무장대 기습으로 사망하자, 대대 병력이 출동해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해 이틀 동안 300명 이상이 희생됐다. 젊은 남자가 다수 희생돼 한동안 북촌리는 무남촌(無男村)이라 불렸다.
1949년 3월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됐다. 이 전투사령부는 제2연대와 유격대대 그리고 제주경찰과 새로 증파된 경찰특별부대를 통합 지휘했다. 이처럼 제주 토벌부대 전투력을 강화한 까닭은 1년 전 무효화된 제주 일부 지역 선거를 재실시하는 문제와 미국 원조에 관한 대통령의 초조감 때문이었다.
이승만, 제주 토벌부대 전투력 강화 속 다랑쉬굴 참극 발생</>
1948년 12월18일, 제9연대 제2대대는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쳤다.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사시켰다. 희생자는 11명으로, 이 중에는 50대 여성도 있었고 아홉 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
다랑쉬굴을 발견한 제주43연구소는 1992년 3월29일 제민일보 43취재반과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했다. 언론은 1992년 4월2일 첫 보도 이후 집중적인 취재를 통해 사건 날짜 및 상황, 희생자의 신원과 유족 등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뒤 유족과 도민 여론은 “양지바른 곳에 안장(安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행정·정보기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화장으로 결정되었다. 유해는 1992년 5월15일 불에 태워져 바다에 뿌려졌고, 다랑쉬굴은 봉쇄되었다.
다랑쉬굴의 유해는 발견 당시부터 43참극의 상징이 되었다. 그 희생은 저항도 못하는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초토화작전의 실상이었고, 캄캄한 굴속에 갇혔다가 40여 년 만에 햇빛을 보았지만 허무하게 화장된 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외면하려고 했던 당시대의 현주소였다. 다랑쉬굴 유해 발굴 직후 경찰과 행정기관은 굴 입구를 시멘트로 막았고, 주변에 철조망을 쳤다.
함병선 연대장은 유재흥 사령관이 제주에 온 1949년 3월 말까지 실질적인 진압 책임자였다. 미군 비밀문서는 “함병선은 신분이나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severe tactics)을 폈다”고 기록했다. 이 때 '북촌 사건'이 발생했고, 봉개리 주민들이 집단 학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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