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걸음으로 간다…전기톱 든 88세 예술가[영감 한 스푼]

김민기자 2023. 4. 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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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신 : 더하고 나누며, 하나’전이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에서 김윤신 작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5월 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에서 개인전 ‘더하고 나누며, 하나’를 열고 있는 조각가 김윤신의 인터뷰를 준비했습니다.

지면에는 이미 한 차례 다루었는데, 분량의 한계로 다루지 못한 뒷이야기까지 상세하게 풀어드리겠습니다.

기자간담회에서 김윤신 작가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등 여러 나라를 누비며 평생 작업하며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에 따로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는데요.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시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날 배신하다니!”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 전시 전경 © 박명래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제가 가장 먼저 궁금했던 건 상명대 교수를 지내던 작가가 50세에 갑자기 아르헨티나로 떠나게 된 사연이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과정이 궁금하다고 묻자 김윤신 작가는 “그 과정은 아무도 모르는데”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김윤신(윤): 그날이 12월 5일이었어요. 학기말 시험 볼 때죠. 이사장님께 방학 동안 나가서 전시를 하겠다고만 말하고 허락을 받고 떠나버렸죠. 그때 우리 조카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었는데, 사실은 이혼을 하고 아이들을 빼앗길까봐 멀리 떠나버린 것이었어요. 지구 반대편으로 가겠다고 거길 무작정 간 거죠.

그리고 조카가 “고모 여기 와봐. 나라가 아주 크고 작품 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고 해 전시를 한다며 제가 떠난 거예요. 학교도, 오빠도, 아무도 모르게. 갔더니 끝 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고, 크고 귀한 나무가 많았죠. 작업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김민(민): 그래서 전시를 하게 되셨군요.

윤: 며칠 만에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공보부에 전시를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이력서를 갖고 오라기에 다음날 써서 갔죠. 공보관님이 ‘대학 교수시군요’ 하더니 저를 미술관으로 데려갔고,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여달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두 달만 달라고 했죠.

민: 무작정 찾아가서 전시를 하게 되신 거네요.

윤: 그때 내가 무슨 배짱이 있었는지 몰라요. 1년 동안 작품 30점을 했죠. 대작도 있고 하다 보니 부에노스아이레스 식물 공원에서 전시를 하게 됐고, 미디어의 관심을 받으면서 작가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합이합일 분이분일 (合二合一 分二分一) 1984-84〉 부분, 84, 미상의 나무, 145×38×35cm © 박명래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민: 1년 동안 한국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나요?

윤: 학교에선 개학을 했으니 저를 찾았고, 나중엔 오빠도 결국 알게 됐어요. 그땐 인터넷도 없고 편지를 써도 몇 개월이나 걸리니 제가 사라진 줄도 다들 몰랐던 거죠. 그러다 제가 88년 초 전시를 하게 돼서 다시 한국에 갔을 때, 오빠가 난리가 났죠.

“내가 군인이고 내 밑에 수천 명이 있지만 한 번도 배반을 당해본 적이 없는데, 딱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날 배반했다.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그럴 수가 있니.”

민: 굉장히 서운해하셨네요. 그런데 떠나기 전에 말을 안 하신 건 말릴까봐 그랬던 거였죠?

윤: 엄청나게 만류를 했겠죠. 대학 교수 되기가 얼마나 힘든데 너 같은 맹숭이가 교수가 됐는데 그걸 마다하느냐며 저를 한심하게 봤어요. 그렇지만 저는 결심했어요. 나는 남미에서 커야겠다. 여기서 조각가가 되어야겠다. 뭘 먹고 살까 굶어 죽진 않을까 고민보다는 내 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죠.

느려도 황소걸음으로 가자

〈대지의 생명력〉, 2023, 브론즈, 118×108×88cm © 박명래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민: 스물여덟 살 때는 프랑스 유학을 가셨어요. ‘결혼은 안 하겠다는 얘기냐’는 오빠의 말에 그렇다고 답하고 정말 평생 세계를 다니며 작업을 하셨어요.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나요?

윤: 나는 전쟁을 많이 겪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제가 원산 출신인데 남쪽으로 피난을 와야 했어요. 일제강점기인 당시 오빠(독립운동가 김국주)가 행방불명이 됐었고 해방이 된 후 서울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엄마와 함께 38선을 넘었죠.

그때 제가 10, 11살이었는데 난민 수용소에서 두 달을 보내고 6.25 전쟁 때는 가족들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고 저는 서울에 혼자 남아 있었어요. 제가 언니가 넷이 있었고, 제 바로 위가 오빠였는데 오빠가 집에 돌아올 수 있으니 저만 남겨둔 거였어요.

민: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었군요.

윤: 전쟁 때는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그저 총을 맞을까봐 두려움밖에 없었어요. 길에는 죽은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고. 안 본 사람은 상상 못 해요. 군복 입은 시체를 보면 혹시나 오빠일까 하고 건드려 보기도 했어요. 며칠 지난 시신은 손이 뚝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또 오빠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오빠가 그렇게 나라를 위해 살았기에 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은 없었고 느릿느릿해도 황소걸음으로 가자. 그런 생각을 했죠.

김윤신. ‘기원 쌓기’ 1970년대. © 박명래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민: ‘기원 쌓기’라는 작업이 인상 깊었어요. 어떤 마음으로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윤: 오빠와 엄마를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에요. 일제 강점기 때 행방불명된 아들이 소식이 없어, 엄마가 매일 산 밑에 가서 흰 그릇에 물을 떠다가 왔어요. 그때 돌을 엄마가 주시면 하나씩 쌓고, 그 옆에 초에 불을 붙인 뒤 두 손을 모아 빌면서 무슨 이야기를 해요.

하루도 빠짐없이 몇 년을 그렇게 하셨어요. 그때 전 어려서 엄마가 왜 그러시는 줄은 몰랐죠. 나중에서야 오빠를 걱정하며 그랬다는 걸 알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되어서, ‘아 엄마가 아들이 살아있기를 염원하는 기도를 한 거였구나’ 깨닫고 난 뒤 나무 조각으로 표현하게 된 거죠.

다시 찾은 고국, 한국 사람들은 귀여워

〈노래하는 나무〉, 2023, 알루미늄에 아크릴 채색, 118×108×88cm © 박명래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민: 오랜만에 한국에 오신 거잖아요. 많은 것들이 새로울 것 같은데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윤: 한국 나무는 한국 사람과 똑같아요. 부드럽고 연하고 고와요. 다루기가 좋아요. 남미에서 단단한 나무만 쓰다 보니 너무 무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딱딱한 나무로 하면 힘만 주면 작업이 더 간단한데, 한국 나무는 부드러워서 굵은 걸로 밀고 그다음 보드라운 걸로 밀고 손이 많이 가요.

그러니 남미 나무처럼 우람하게 무게를 주는 게 아니라 섬세하게 모양을 내고 거기에 색을 칠해 그림까지 넣으니 아주 얌전하고 착하고 연하게 보이죠.

한국은 가끔 왔다 갔다 했지만 요즘 특히 한국 여성들이 더 젊고 어리게 보여요. 귀여워. 왜 이렇게 귀엽나요. 남미 사람들은 눈이 큰데, 한국은 눈이 적절한 크기에 있을 게 다 있어서 귀여워요. 또 섬세하고 친절하죠.

민: 멕시코에서도 하루 한 끼만 먹고 작업을 하셨다구요.

윤: 따꼬(타코)라고, 강냉이를 갈아서 판에다 우리나라 지짐이 하듯이 뿌려요. 그럼 종잇장처럼 마르는데 그사이에 선인장 이파리 연한 것과 풋고추 조그마한 걸 넣어서 먹죠. 테칼리라는 마을이었는데, 먹을 게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저녁에 배고프면 맥주로 버티기도 하도. 한국 문화원에서 가끔씩 갈비를 해서 가져와 주시면 그때 고기를 먹는 거죠. 일주일 만에 올 때도 있고, 어떨 땐 이주일, 한 달도….

민: 그때 오닉스 돌이 궁금해서 가셨던 거죠?

윤: 그렇죠. 한국 대사관에서 이런 재료가 있다고 알려주어서 가게 됐어요. 브라질에서도 야전용 침대 하나 있는 호텔에서 아침에 팥 삶은 것과 딱딱한 빵을 먹고 지냈었죠.

민: 꾸준히 작업만 생각하면서 지내셨네요.

윤: 한국에 와보니 입체인 조각과 평면인 회화가 하나가 되는 작업을 했다는 게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 하나는 확고하게 무언가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또 젊은 세대가 정말 확실하게 정확하게 일을 하는 걸 보면서 변화된 것이 보여요. 젊은 사람들이 일을 빨리빨리 잘 돌아가게 하니 창의력이 많고 정확하다. 이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수 있겠다,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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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의 나이지만 지금도 전기톱을 들고 나무 조각을 한다는 김윤신 작가는 그저 자신의 예술 세계, 그리고 젊은 세대를 보며 느끼는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님도 ‘작가님과 대화를 하면 에너지를 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오래된 건물과 잘 어울리는 김윤신 작가의 조각 작품을 남서울미술관에서 직접 만나보세요.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 전시 전경 © 박명래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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