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하고 쓸데없는 일’ 해보자…이 봄이 가기 전에 국토종주
모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요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가슴이 뛰는,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저 멀리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내 힘으로 모든 걸 헤쳐나가야 하는 그런 용기가 생겨날까? 끝없는 지평선이, 높은 산이 눈앞에 펼쳐질까? 모험. 그 단어의 뜻이 퇴색돼가는 요즘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테크의 영역에서 쓰는 단어, 위험하지만 크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사업 아이디어에 쓰이는 단어. 그 단어가 모험이다. 그런데 이번 봄, 멀리 떠난 자전거 여행에서 이화령 고개가 눈앞을 가로막았을 때, 평소에 잘 떠오르지 않던 ‘모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기분을 전하고 싶었다. 숨이 차는 고통이나, 등줄기가 오싹한 기분, 저 산마루 끝에 도착했을 때의 짜릿한 성취감. 서해에서 시작해 남해에 이르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해보라고 등을 떠밀고 싶어졌다. 10년 후 쯤 “2023년 어느 봄날 내가 모험을 떠났지”라고 평생 기억할 만한 일을 추천하고 싶었다.
10여년 전 4대강 사업으로 한강~남한강~문경새재~낙동강을 연결하는 633㎞짜리 자전거길이 완성됐다. 강과 강을 따라서 길을 내고 강과 강 사이의 먼 길들은 인적 드문 옛 산길들로 연결시켰다. 인천 혹은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종주 인증 메달이 목표라면 아라뱃길 인증센터에서부터, 자신과의 싸움이 목표라면 서울 어디든 그곳이 출발지점이 된다.
수안보 찍고 이화령만 넘으면
한강 자전거길을 따라가다 보면 양평역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지나면 인적이 드물어지면서 돌아가고 싶어도 여주까지는 돌아올 차편이 없다. 그러니 첫날 무리해서라도 양평역만 넘어서자. 그러면 부상 및 심각한 멘털 저하가 아니라면 오기로라도 이 여행을 끝낼 수밖에 없게 된다. 한강~양평~충주 구간은 강을 따라 여행하는 길이다. 강변 길 자체가 어렵지 평지 위주로 되어있기 때문에 지도를 봐 가면서 자신의 페이스를 보아가면서 쉬엄쉬엄 갈 수 있다. 중간중간 마을을 지나갈 때 밥을 먹고, 물을 보충하고, 숙소는 예약을 하기보다는 점심을 먹으면서 오후에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자신의 페이스를 가늠하고 잡아야 한다. 숙련도에 따라 하루 또는 3일 만에 충주에 닿을 수도 있다. 첫날 충주까지 갈 실력자가 아니라면 2일차든, 3일차든 전반부 라이딩의 종점을 ‘수안보’로 잡기를 추천한다. 이름난 온천이기 때문에 지친 몸을 달랠 수 있고 식당도 지천이다. 이곳에서 쉬어 가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다음 날 이화령(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을 잇는 고개)이라는 국토종주 최대 관문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화령은 국도가 뚫리면서 잊힌 옛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인데, 매끈한 아스팔트 길이다. 하지만, 이 길에는 차를 타고 갈 때는 한번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중력이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눈앞에 이화령이 나타났을 때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다. 저 산을 넘어야 한다는 좌절감, ‘나는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라며 자전거를 던져버리고 싶은 깊은 분노, 그리고 정상에 올랐을 때의 짜릿함. 부산에서 출발하든 서울에서 출발하든 국토의 한가운데에서 만나게 되는 이화령은 종주의 가장 큰 난관이자 가장 큰 기쁨이다. 어느 쪽에서든 이화령을 넘으면 거리로는 반을 지나게 되고, 어느 쪽으로든 이 이상의 난관은 더 이상 없다는 안도감이 종주자들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이화령을 넘고 나면 문경에 도착하고 그 길은 상주로 이어진다. 그 뒤는 본격적인 낙동강 구간. 여전히 이 길에는 다람재, 박진고개, 개비리 임도 등 당신을 시험하는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당신은 이미 이화령을 넘었다는 자부심과 어떤 상황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것이므로, 이 길에 무엇이 있다 소개하기보단 다치지 말고 페이스를 잘 지켜가며 길을 따라 계속 페달을 멈추지 않길 바랄 뿐이다. 국토 종주 마지막 지점은 부산 낙동강 하구둑이다. 고속버스 화물칸에는 접이식이 아니어도 자전거가 들어간다. 나도 부산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줄이고 빼고 라이딩
자전거는 필요하지만, 어떤 종류든 상관없다. 바퀴가 얇은 로드 바이크는 조금 더 빠르고, 엠티비(MTB, 산악자전거)는 조금 더 편하다. 서울시 공유 자전거인 따릉이를 타고 종주를 한 사람도 있고, 2인용 자전거인 텐덤 바이크를 커플이 타고 종주에 성공한 경우도 있다. 믿기 힘들겠지만 자전거의 기본 성능은 이미 수십년 전에 완성됐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자전거가 종주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성능’이다. 출발 전에 자전거 가게에 가서 점검을 받고 문제가 없다면 어떤 종류의 자전거도 종주를 하기에 충분하다. 이에 더해 필수 준비물은 헬멧, 고글, 전화기, 전조등, 후미등, 보조배터리, 신용카드와 약간의 현금, 물통. 이게 전부다. 비가 오면 우의도 있어야 하고, 혹시 펑크를 대비해서 타이어도 필요할 것 같고, 여행을 기록할 사진기, 여벌 옷, 가방 등등 굉장히 많은 것들이 필요한 것 같지만, 모든 준비물은 나중엔 ‘무게’로 다가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이걸 모두 우리의 대퇴사두근으로 끌어야 한다. 그래서 가급적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걸 추천한다. 비가 오면 맞거나 피해 가고, 속옷과 양말은 편의점에서 필요할 때마다 살 수 있다. 펑크가 날 수 있지만, 스마트폰으로 자전거 가게를 찾거나 택시를 불러 자전거를 싣고 이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필요한 것은 용기, 시간, 건강. 그리고 가능하다면 함께 갈 친구.
국토종주의 가장 좋은 시기는 봄이다. ‘차근차근 준비해서 떠나야지’ 하다 보면, 곧 뜨거운 여름이 올 것이다. 그 때는 지금보다 2배는 더 힘들어진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가야지’. 그런데 지금 떠오른 용기와 목표는 유통기한이 있다. 그렇게 2023년의 모험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두에 ‘모험’이라는 단어를 굳이 꺼내 들었다. 무모함과 쓸데없는 일. 그런 일을 목표 삼아 무언가를 해 본 기억이 우리는 너무 없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국토종주의 가장 좋은 시기는 지금이다. 그리고 이 봄이 지나가고 있다.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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