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약하지만 강인한 ‘물’… 미술의 언어로 공존을 모색하다 [박미란의 오프 더 캔버스]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주제 아래 기획
도덕경 78장 나오는 ‘柔弱於水’ 차용 문구
만물의 생성·자연세계 유지하는 원동력
변화 가져오는 전환과 회복 가능성 은유
태평양전쟁의 상흔 탐구한 ‘열대이야기’
아마존 우림 생태 영상물 ‘아이쿠알리아’
마라비야의 ‘질병 투척기’ 인상적 작품
세계 미술계의 이목이 한국을 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국제 비엔날레 중 하나로 우뚝 선 제14회 광주비엔날레가 지난 7일 개막했기 때문이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에 개최됐다. 같은 해 세계 최대 미술행사인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처음 마련되기도 했다. 이후 한국은 국제 미술의 전개와 발전에 참여하는 주체로서 본격적으로 발돋움했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라는 주제 아래 기획됐다. 도덕경 78장에 등장하는 ‘유약어수(柔弱於水)’를 차용한 문구로 ‘세상에서는 물이 가장 유약하지만, 공력이 아무리 굳세고 강한 것이라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처럼 부드럽고 여린 태도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란 어떤 것일까. 땅에 스민 빗방울과 돌을 스치는 물줄기는 오래 거듭된 시간 끝에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바위를 부수어낸다. 미술의 방식으로 세상에 말 거는 일 또한 그러한 노력일 테다. 은유와 상징의 언어로 지금을 비추어 보여주고, 잊힌 이야기들을 들추어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아내는 잠시간의 공명이 오늘의 풍경에 조그마한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전시에 선보인 많은 작품이 그러한 힘을 갖고 있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끼바위쿠르르(2021∼)는 고결, 김중원, 조지은으로 구성된 팀이다. 자연 한구석 좁은 틈새에서 땅과 공기의 경계에 적응해 살아가는 이끼를 좋아해 팀 이름을 이처럼 지었다. 뒤에 붙은 ‘쿠르르’는 모호한 국적의 의성어다. 지난해 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저명한 국제미술제 ‘도큐멘타15’(2022)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 팀으로서 주목받았다. 당시 출품한 ‘열대이야기’(2022)를 이번 광주비엔날레에 다시 선보인다.
이끼바위쿠르르는 식물과 인류, 문명과 자연, 식민주의와 생태의 연결 고리를 다각도로 탐구한다. ‘열대이야기’는 2채널 영상 작품과 25점의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태평양전쟁 및 식민주의의 상흔을 탐구한다. 제주,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아시아와 태평양 섬들을 방문해 자료를 모은 뒤 2019년부터 제작했다. 어두운 전시실에 놓인 두 대형 스크린은 정글 같은 풍경 사이 생경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잔해를 보여준다. 수많은 섬에 이러한 잔흔이 남아 있다. 전쟁 당시 원주민을 강제 동원해 건설한 활주로와 진지 터가 여럿 방치된 채다. 화면은 인류의 상흔 위로 무성하게 자라난 자연의 시간을 담담하게 비춘다.
작가가 등장하여 악기를 연주하자 일순간 전시장이 소리로 가득 찼다. 해저의 고래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애절한 비명소리 같기도 했다. 귓가를 구슬처럼 구르다가도 가슴 한복판을 무겁게 울려대는 낯설고도 아름다운 소리의 향연 가운데 수많은 발걸음이 멈추어 섰다. 마라비야는 자신의 작품을 ‘치유 기계’라 부른다. 개인에 대한 사회 구조의 폭력이 자신의 신체에 물리적 질병을 남겼다면, 그러한 몸으로 연주한 거대한 진동음을 다시 사회에 들려주는 것이다. 마라비야의 악기는 치유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소리의 파장을 자아낸다. 그것이 과학적 근거를 지녔는지에 앞서 중요한 것은 광주의 현장이, 세계의 관객이 그 소리에 유심히 귀 기울였다는 점이다.
미술은 삶 속에 빗물처럼 스미거나, 이슬처럼 반짝이거나, 파도처럼 거세게 요동친다. 그러다 문득 수많은 마음이 진동을 공유하는 순간을 이끌어낸다. 물속에 듬뿍 잠긴 듯 주위가 적막해지는 순간들, 하나의 시공간에 깃든 감각이 동시에 울림을 일으키는 그런 순간들. 현장을 메운 작품들의 이야기를 짚어가다 보면 광주정신이 비단 하나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된다. 넓은 세상 속에서 다양한 주체에 의해 안타깝게 반복되는 아픔에 공감하고, 반성하고, 조금 더 올바른 내일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하나의 유약한 마음이 수없이 모여 커다란 공명을 이루어낼 가까운 미래를 기약하면서.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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