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약하지만 강인한 ‘물’… 미술의 언어로 공존을 모색하다 [박미란의 오프 더 캔버스]

2023. 4. 1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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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의 장’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주제 아래 기획
도덕경 78장 나오는 ‘柔弱於水’ 차용 문구
만물의 생성·자연세계 유지하는 원동력
변화 가져오는 전환과 회복 가능성 은유
태평양전쟁의 상흔 탐구한 ‘열대이야기’
아마존 우림 생태 영상물 ‘아이쿠알리아’
마라비야의 ‘질병 투척기’ 인상적 작품

세계 미술계의 이목이 한국을 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국제 비엔날레 중 하나로 우뚝 선 제14회 광주비엔날레가 지난 7일 개막했기 때문이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에 개최됐다. 같은 해 세계 최대 미술행사인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처음 마련되기도 했다. 이후 한국은 국제 미술의 전개와 발전에 참여하는 주체로서 본격적으로 발돋움했다.

영국의 큐레이터이자 미술가 폴 오닐(Paul O’Neill)은 비엔날레를 ‘글로컬(glocal)’ 현상의 맥락에서 설명한 바 있다. 글로컬이란 1980년대 지역적인 것(local)과 세계적인 것(global)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용어다. 비엔날레 개최지는 전시 기간 국제 미술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동시에 해당 국가 또는 지역의 특성을 조명함으로써 국제성과 지역성을 연결 짓는다. 시대의 동향에 발맞춘 주제의식을 표명하는 한편 지역의 역사, 정서, 생태, 사회문화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계된 특수한 동시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엔날레 현장은 지역과 세계, 삶과 미술, 역사와 현재의 시간이 한시적 공명을 일으키는 장이다.
이끼바위쿠르르, ‘열대이야기’(2022).
◆유약하고도 강인한 물의 속성 주제 삼은 전시

제14회 광주비엔날레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라는 주제 아래 기획됐다. 도덕경 78장에 등장하는 ‘유약어수(柔弱於水)’를 차용한 문구로 ‘세상에서는 물이 가장 유약하지만, 공력이 아무리 굳세고 강한 것이라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은 생명이 태동하고 성장하는 기반이자 자연세계를 유지하고 순환시키는 원동력이다. 전시가 주제어로 삼은 물은 전환과 회복의 가능성을 은유한다. 기획의 변에서 밝힌바 “오랜 시간에 걸쳐 스며드는 부드러움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물의 힘”이 전 지구적 세계의 “분열과 차이를 포용”하는 방식을 미술의 언어에 비추어 모색하는 시도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로부터 세계를 품어 안은 대양에 이르기까지, 때로 가장 유약하지만 한편 무엇보다 강인한 물의 속성을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측면에 맞닿아 흐르는 미묘한 저류와 무형의 힘”에 빗대어 보는 것이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전시 전경, 전시관 제4전시실.
이번 전시는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을 비롯하여 국립광주박물관,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무각사, 예술공간 집 등의 장소에서 국내외 79인 작가의 300여 작품을 선보인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은 네 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구성된다. ‘은은한 광륜’(제1, 2전시실)은 저항과 연대의 정신, ‘조상의 목소리’(제3전시실)는 비서구권 토착 문화의 대안적 가능성, ‘일시적 주권’(제4전시실)은 이주민 서사와 포스트 식민주의, ‘행성의 시간들’(제5전시실)은 생태환경과 문명의 연결성을 다룬다. 가벽과 패널 등 전시 디자인 요소들을 친환경 소재로 제작하는 등 주제의식에 부합하는 큐레이팅 실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작가 정보를 표기할 때에는 국적 대신 출생 및 활동한 지역 이름만 기재하여 혼종적 정체성을 부각했다. 트인 공간을 감각적으로 구획하여 유연한 동선과 단정한 배치를 동시에 이끌어낸 기획자의 역량이 돋보인다.
비엔날레를 이끄는 이숙경 예술감독은 영국 테이트 모던 국제 미술 수석 큐레이터이며 ‘현대 테이트 리서치 센터: 트랜스내셔널’의 수장이다. 홍익대에서 예술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1993년부터 1998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로 재직했다. 이후 영국에 건너가 런던시티대학교와 에식스대학교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테이트 리버풀을 거쳐 테이트 모던에 자리 잡은 후로 기획 및 연구 활동을 지속하며 국제적 감각을 체득했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및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에밀리아 스카눌리터, ‘아이쿠알리아’(2023).
◆바위를 부수는 물줄기…미술이 지닌 공명의 힘

물처럼 부드럽고 여린 태도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란 어떤 것일까. 땅에 스민 빗방울과 돌을 스치는 물줄기는 오래 거듭된 시간 끝에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바위를 부수어낸다. 미술의 방식으로 세상에 말 거는 일 또한 그러한 노력일 테다. 은유와 상징의 언어로 지금을 비추어 보여주고, 잊힌 이야기들을 들추어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아내는 잠시간의 공명이 오늘의 풍경에 조그마한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전시에 선보인 많은 작품이 그러한 힘을 갖고 있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끼바위쿠르르(2021∼)는 고결, 김중원, 조지은으로 구성된 팀이다. 자연 한구석 좁은 틈새에서 땅과 공기의 경계에 적응해 살아가는 이끼를 좋아해 팀 이름을 이처럼 지었다. 뒤에 붙은 ‘쿠르르’는 모호한 국적의 의성어다. 지난해 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저명한 국제미술제 ‘도큐멘타15’(2022)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 팀으로서 주목받았다. 당시 출품한 ‘열대이야기’(2022)를 이번 광주비엔날레에 다시 선보인다.

이끼바위쿠르르는 식물과 인류, 문명과 자연, 식민주의와 생태의 연결 고리를 다각도로 탐구한다. ‘열대이야기’는 2채널 영상 작품과 25점의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태평양전쟁 및 식민주의의 상흔을 탐구한다. 제주,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아시아와 태평양 섬들을 방문해 자료를 모은 뒤 2019년부터 제작했다. 어두운 전시실에 놓인 두 대형 스크린은 정글 같은 풍경 사이 생경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잔해를 보여준다. 수많은 섬에 이러한 잔흔이 남아 있다. 전쟁 당시 원주민을 강제 동원해 건설한 활주로와 진지 터가 여럿 방치된 채다. 화면은 인류의 상흔 위로 무성하게 자라난 자연의 시간을 담담하게 비춘다.

에밀리아 스카눌리터(36)의 ‘아이쿠알리아’(2023) 또한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다. 아마존 우림을 둘러싼 물의 다양한 모습을 수년간 수집하고 재구성한 영상이다. 화면은 인어 같은 생명체가 안데스 고원 솔리몽에스 강을 헤엄쳐 나아가는 궤적을 좇는다. 검은 네그로 강물과 하얀 솔리몽에스 강물이 맞닿는 경계를 수직으로 횡단하는 인어의 모습을 항공 시점으로 비춘 장면은 심미적 감동과 함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암실의 천장을 반사판으로 제작하여 스크린 위의 영상이 수직으로 확장되는 착시효과를 이끌어냈다.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 공간과 가상 스크린, 일상과 신화의 모호한 경계를 감각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다.
과달루페 마라비야, ‘질병 투척기’(2022) 연작.
과달루페 마라비야(47)의 작품은 소리로서 완성된다. 마라비야는 1980년대 엘살바도르 내전 당시 홀몸으로 미국 국경을 넘은 아이 중 하나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암 투병의 경험을 연결 지어 이번 전시 출품작인 ‘질병 투척기’ 연작을 제작했다. 그의 조각들은 저마다 거대한 동물의 유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팔과 다리, 손, 두개골과 갈비뼈 같은 형상들이 기이하게 뒤엉켜 사물과 생명체의 경계에 놓인 모양새다. 나뭇가지와 풀, 강철과 솜, 플라스틱 등의 재료를 엮어 만들었다. 작가의 이주 경로를 재추적하는 의식 속에서 수집한 오브제들이다. 구조물의 중심마다 징과 같은 타악기가 자리 잡고 있다.

작가가 등장하여 악기를 연주하자 일순간 전시장이 소리로 가득 찼다. 해저의 고래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애절한 비명소리 같기도 했다. 귓가를 구슬처럼 구르다가도 가슴 한복판을 무겁게 울려대는 낯설고도 아름다운 소리의 향연 가운데 수많은 발걸음이 멈추어 섰다. 마라비야는 자신의 작품을 ‘치유 기계’라 부른다. 개인에 대한 사회 구조의 폭력이 자신의 신체에 물리적 질병을 남겼다면, 그러한 몸으로 연주한 거대한 진동음을 다시 사회에 들려주는 것이다. 마라비야의 악기는 치유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소리의 파장을 자아낸다. 그것이 과학적 근거를 지녔는지에 앞서 중요한 것은 광주의 현장이, 세계의 관객이 그 소리에 유심히 귀 기울였다는 점이다.

미술은 삶 속에 빗물처럼 스미거나, 이슬처럼 반짝이거나, 파도처럼 거세게 요동친다. 그러다 문득 수많은 마음이 진동을 공유하는 순간을 이끌어낸다. 물속에 듬뿍 잠긴 듯 주위가 적막해지는 순간들, 하나의 시공간에 깃든 감각이 동시에 울림을 일으키는 그런 순간들. 현장을 메운 작품들의 이야기를 짚어가다 보면 광주정신이 비단 하나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된다. 넓은 세상 속에서 다양한 주체에 의해 안타깝게 반복되는 아픔에 공감하고, 반성하고, 조금 더 올바른 내일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하나의 유약한 마음이 수없이 모여 커다란 공명을 이루어낼 가까운 미래를 기약하면서.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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