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농민을 정말 홀대했나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3. 4. 1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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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뷰파인더] 양곡관리법과 경자유전의 원칙

● 논객 진중권의 ‘헛돈 발언’
● 부농보다 소농에게 치명적
● ‘식량 주권’의 진짜 키는 석유
● 기업화된 농업 불가능한 여건
● 韓 장바구니 물가 비싼 이유

4월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농민단체들이 쌀값 정상화법 공포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언제까지 외국인 노동자하고 70세(대) 분들을 먹여 살리는 데 돈을 헛써야 되나."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가 4월 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강행해서 통과시킨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평소 '모두까기 인형'으로 불리던 진중권이지만 이 말에 대해 쏟아지는 반발은 퍽 심했던 듯하다. 그럴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대중의 여론에 정면으로 반하는 발언이었다. 한국갤럽이 4월 7일 수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양곡법 개정안에 찬성하는 사람은 응답자 중 60%, 반대하는 사람은 26%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 과반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 '너는 누구 편이냐'는 손가락질을 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법이 통과된 다음날인 5일 윤석열 대통령이 이 법에 대해 거부권, 즉 재의요구권을 행사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양곡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여당 혹은 현 정부의 적극적 지지층과 대체로 포개졌다. 비록 지난 대선에 민주당의 재집권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진중권은 여전히 진보 논객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진중권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양곡법 개정안 반대자 26%가 아니라, 찬성하는 60% 중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에 속한다는 소리다.

이렇듯 편 들어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진중권의 '헛돈 발언'은 퍽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종의 '패륜 발언'으로 공격하기 딱 좋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논객은 대중을 이해시키면서 대중의 오해 또한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직업이긴 하다. 하지만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진중권의 입장 자체는 틀리다고 말하기 어렵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개정안은 잘못됐다. 더불어민주당이 여당이던 문재인 정권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왜곡된 영농 정책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농업의 현실을 보지 않으려 드는, 농민을 도시민의 감성 충족용 도구로, 인문학적 용어를 빌자면 '타자'로 여기는 나쁜 시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안이기도 하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벌이가 좋은 부농과 농산물 창고업자들에게 국고 보조금을 몰아준다. 이로 인해 식량 가격 상승을 유발해 전체 지출 중 식비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을 약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니 악법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제6공화국 이른바 '87년 체제'의 발전적 해체와 새로운 국가 시스템의 창출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포퓰리즘이 바로 양곡관리법 논란에 담겨 있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농림축산식품부의 반박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4월 13일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행사한 법안은 국회에서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표결 결과 재석 의원 290명 중 찬성 177명, 반대 112명, 무효 1명이 나오면서 필요한 득표를 얻지 못했다.

앞서 인용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가 왜곡됐다는 반론이 나왔다는 점도 언급해야 한다. 4월 12일 농림축산식품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갤럽 조사는 설문을 위한 설문지에 심각한 오류와 설문설계 문제가 있었다"며 "정부는 이 설문조사 결과를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설문조사 결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대단히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정부의 항변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한국갤럽이 제공한 설문지에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제대로 담겨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설문지에는 (1) 쌀 수요 대비 초과생산량이 (2) 3~5%이거나, 쌀값이 (3) 전년 대비 5~8% 하락하면 정부가 초과생산량을 의무적으로 사들여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제출된 개정안은 쌀 '수요'가 아닌 '생산량'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3~5% 범위에서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기준 이상이거나 등의 내용이 누락돼 있을 뿐 아니라, '전년'이 아닌 '평년' 대비를 기준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올해 쌀이 100섬 생산됐는데, 쌀 수요는 95섬이라고 가정해 보자. 한국갤럽의 설문 문항에 따르면 이 경우 수요 대비 초과생산량은 95:5, 약 5.26%다. 쌀을 정부가 사들일 의무에서 벗어날 만큼 많은 생산량이 초과된 것이다. 실제 제출된 법안에 따르면 이 경우 정부는 남는 쌀을 사야 한다. 수요가 아닌 생산량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므로, 초과생산량은 정확히 5%를 기록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년'이 아닌 '평년' 대비를 기준으로 삼는 것 역시 정부에 턱없이 불리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농업생산량은 꾸준히 늘고 쌀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이런 식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정부는 이전에 비해 초과생산 된 쌀을 훨씬 많이 사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정부에 따르면 한국갤럽 설문조사는 질문 항목부터 왜곡된 답변을 유도하고 있다. 찬성과 반대를 그냥 묻는 게 아니라 거기에 어떤 이유를 제시했는데 그 내용이 편향돼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한국갤럽이 제시한 질문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쌀값 안정화, 농가 소득보장을 위해 찬성. (2) 쌀 공급과잉, 정부 재정부담 늘어 반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경우 쌀값이 안정화되고 농가의 소득이 보장될 것처럼 보이도록 문항을 짰다는 게 정부 측 비판이다. 상당히 타당한 비판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제안한 것과 같은 양곡관리법이 통과됐다면 쌀농사는 '땅 짚고 헤엄치기'가 되며, 더 많은 농민들이 다른 농사 대신 쌀농사를 지을 유인동기를 얻게 되는데, 이는 쌀값의 안정화가 아니라 폭락을 불러온다. 이는 다른 방식으로 소득을 벌충할 수 있는 경로를 상대적으로 쉽게 마련할 수 있는 부농보다, 적은 수의 작물에 생계를 유지하는 소농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교역로 사수가 중요한 이유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잉여생산물에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매입하면 과잉생산이 벌어진다. 과잉생산은 국가 경제 전체에도 부담이지만 특히 소규모 생산자에게 불리하다. 보조금이 아무리 크다 해도 손해 전체를 벌충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과잉생산으로 인한 손해보다 보조금이 더 크다면 보조금을 노리고 시장에 참여할 또 다른 생산자가 등장한다. 결국 보조금의 효과가 0으로 수렴할 때까지 비효율이 증가한다. 수요-공급 곡선의 작동 원리를 응용해 생각해보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맨큐의 경제학'을 비롯해 대다수 경제학 교과서에서 농업 보조금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이유도 비효율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농업 보조금이 지급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인 이유는 식량 안보 때문이다. 지금은 평화롭지만 언제든 전쟁이 벌어지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식품 수입 경로가 차단될 수 있으니, 최소한의 기간만이라도 버틸 수 있는 농작물을 확보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의 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특히 한국처럼 농작물 뿐 아니라 비료와 연료까지 모두 수입해야 하는 국가의 경우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가령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려 함으로써 미 해군과 동중국해에서 전투를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자. 호르무츠 해협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들어와야 할 한국의 유조선은 발이 묶이거나 아주 먼 항로를 돌아야만 국내에 들어올 수 있다. 그 경우 멈추는 것은 승용차만이 아니다. 농기계에 투입되어야 할 연료,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비료 역시 국내 재고의 소진과 함께 동나게 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농업생산력의 근간이 허물어진다는 말과 같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폴란이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오늘날은 땅에 석유를 뿌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우리는 사실 식물이 아니라 석유의 에너지를 간접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한반도가 전시 상태에 돌입하고 우리의 무역로가 봉쇄되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쌀이 아니라 석유다. '식량 주권'은 쌀농사를 얼마나 짓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교역로를 얼마나 잘 지켜내느냐에 달린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4월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의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더불어민주당이 강행 처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재명의 포퓰리즘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셈법은 또렷하다. '가난한 농민을 돕는 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그림을 만들어냄으로써 내년 총선까지 끌고 갈 악재로 만들려는 것이다. 한 표가 아쉽고 소중한 총선에서 '대통령이 농민을 홀대한다'는 이미지는 여당에게 적잖은 부담에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라면 이재명의 포퓰리즘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이런 프레이밍이 통한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의 위기를 보여준다. 농업과 농지를 둘러싼 논란이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갇힌 채, 온정주의의 탈을 쓰고 국가의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 오늘날의 농촌에 '70대 노인과 외국인 노동자'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농업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정하고 있는 헌법 제121조 제1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다.

우리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작은 규모로 농사를 짓도록 강제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농업생산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될 수 없는 이유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기업화된 농업이 불가능한 여건 때문이다. 더 좋은 설비, 농기계, 합리적 생산 기법 및 재고 관리 등을 도입할 수 없는 탓이다. 이렇다보니 한국의 장바구니 물가는 뉴욕, 런던, 도쿄 등 세계적인 대도시에 뒤지지 않을 만큼 비싸다. 그 피해는 가난한 이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퇴임을 앞두고 있던 문재인 전 대통령마저 본인의 사저를 짓기 위해 농지를 구입하고 졸속으로 형질변경 허가를 받았다는 비난이 쏟아졌던 사안을 떠올려 보자. 농업과 농촌에 대한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나라를 걱정하고 빈곤층의 장바구니를 근심하는 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합심하여 헌법을 개정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고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 경자유전의 원칙을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농업의 길을 개척하지 않는 한, 제6공화국 체제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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