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판례가 낳은 '공짜야근'…"오늘도 자정 퇴근"

심재현 기자 2023. 4. 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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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공짜야근 없는 세상②
[편집자주] 오늘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무직 근로자들이 '공짜야근'을 한다.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이든 69시간이든 '포괄임금제' 아래에선 보상없는 초과근무를 피하기 어렵다. 근로시간 측정이 어려운 경우에만 쓰도록 한 포괄임금제가 '전가의 보도'처럼 남용되는 현실을 고칠 방법은 없을까.

대한상공회의소가 2015년 '제2회 기업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으로 선정한 '아빠는 야근 중'(회사원 이재학씨 출품작). 늦은 밤 서울 도심의 한 오피스빌딩을 찍은 사진으로 야근하는 샐러리맨들의 생생한 모습을 포착했다. /사진제공=대한상공회의소

'공짜야근' 논란의 핵심으로 지목되는 포괄임금제는 법에 없는 제도다. 근로기준법상 '일한 만큼 임금을 지급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정해진 근무시간 외에 몇 시간 더 일하는지와 상관없이 미리 정한 초과근무수당을 기본임금에 합해 지급하는 방식은 국회에서 입법된 적이 없다.

법에 없는 제도가 산업현장 곳곳에서 반세기 넘게 공공연하게 쓰이는 근거는 1970년대부터 포괄임금제를 기업의 관행으로 인정한 법원 판례다. 산업화의 길목, '과로사회'라는 낯설지 않은 사회 분위기 속에 초과근무를 사실상 용인하는 판결이 주를 이뤘다.

판례가 가이드…'특수직종만 적용' 기준도 이제 갓 10년
1980~1990년대에는 '제반사정에 비춰 정당하다면'이라는 문구의 판결이 포괄임금제를 뒷받침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 해석이라 판사마다 다른 고무줄 판결이 포괄임금제 확산을 부추겼다.

법원이 포괄임금제 적용 기준을 다듬기 시작한 것은 이제 10년이 갓 넘은 수준이다. 2010년 전후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어렵거나 근로시간대가 일반적이지 않은 특수 직종을 중심으로 △노사 합의에 따라 △근로기준법이 정한 규제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포괄임금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기준이 마련된 게 이 무렵이다.


포괄임금제 성립 조건을 노동시간 산정이 불가능한 경우로 한정한 대법원 판결은 2010년 5월 처음 나왔다. 대법원이 한 대학의 경비원이 포괄임금제에 반발해 학교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감시 업무처럼 노동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포괄임금제 방식의 임금지급 계약은 허용될 수 없다고 판결하면서 하급심들도 대체로 이 법리를 따른다.

2017년 6월 서울중앙지법 민사부는 광산 노동자 7명이 포괄임금 방식의 임금지급이 무효라며 연장·휴일수당 등을 광산업체에 청구한 소송에서 노동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포괄임금제로 책정된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노사간 묵시적 합의가 있다고 인정했던 판례가 뒤집힌 것은 2016년이다. 대법원은 그해 10월 사용자와 노동사 사이에 포괄임금제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포괄임금제를 허용한다고 판결했다.

"저녁이 있는 삶? 공짜야근의 삶"
지금까지의 판례를 바탕으로 판단하면 '노동시간 산정이 불가능한 경우'와 '사용자와 노동자가 명시적으로 합의한 경우'에만 포괄임금제가 가능하다.

문제는 법원의 이런 판례에도 불구하고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지 않은 사무직과 서비스업 등에서도 포괄임금제가 여전히 관행이라는 점이다. 특히 크런치모드(초강도 근무체제)와 과로사 논란이 제기된 IT·게임업계에서는 포괄임금제가 일상이다. 포괄임금제를 적용할 수 있는 업무나 근로시간 형태가 어떤 것인지 기준이 여전히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탓이다.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수도권지부 IT위원회는 지난 한 달 동안 IT·게임업계 회사 111곳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84곳(76%)이 포괄임금제를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이달 6일 밝혔다. 고용노동부의 '2020 포괄임금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9년 포괄임금제 적용업체는 조사 대상 2522곳 중 749곳(29.7%)으로 나타났다. 사업장 규모별로 상시 근로자 수 10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의 30.3%가 포괄임금제를 적용했다.

서울의 한 중소 게임업체 팀장급 직원인 이모(32)씨는 "오전 9시30분 출근, 오후 6시30분 퇴근을 조건으로 근로계약서를 썼는데 자정까지 야근은 기본이고 일이 몰릴 때는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일한다"며 "자정 넘어 퇴근해도 다음날 오전 11시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는데 '저녁이 있는 삶'은 고사하고 초과근무수당도 없는 '공짜야근의 삶'"이라고 말했다.

"재계약 때 따질 수 있나요"…정산제도 있어도 눈치
포괄임금제는 대기업보다는 상대적으로 근무여건이 팍팍한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에서 만연하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시급 1만원 시대'로 치닫는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 근무제의 여파로 인건비 등의 부담이 버거운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포괄임금제라는 '우회로'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고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은 초과근무수당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더라도 1~2시간의 초과근무를 따박따박 정산하기가 눈치 보인다.

수도권 부품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김모씨(33)는 "재계약이 코 앞인데 초과근무수당을 갖고 따질 수 있겠냐"며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보기에는 주당 근무시간을 개편하려면 포괄임금제도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사진=홍봉진 기자 honggga@


국회에서 법으로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포괄임금제는 일한 만큼 임금을 지급한다는 원칙 아래 근로계약에 임금의 구성항목·계산방법·지급방법을 명시하도록 하고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도록 한 법 취지를 무색하게 만든다"며 "근로기준법으로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라고 말했다.

김홍영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포괄임금제는 판례법리로 체계화됐기 때문에 해석론으로 제도를 개선하기엔 한계가 있다"며 "궁극적으로 입법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재현 기자 urm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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