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투입 로봇은 몇초 만에 멈췄다…재난 로봇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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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일본에서 일어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수많은 로봇공학자에게 자괴감과 허탈감을 안겼다. 사람을 대신해 위험한 사고 현장에 투입된 로봇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봇들은 고농도의 방사선에 노출되자 작동을 시작한 지 단 몇초 만에 멈췄다. 한재권 한양대 교수(로봇공학)는 2015년에 펴낸 책 <로봇 정신>에서 “로봇이 아직까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보고 느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로봇 최강국 일본이 정작 필요할 때 쓸 만한 로봇을 내놓지 못한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에서 제기됐다. 도대체 그 많은 일본의 로봇들은 어디 있냐고, 사람들은 물었다.
항상 예기치 못하게 돌발한다는 재난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12년 전 로봇의 실패가 그렇게 충격적인 일은 아니다. 강한 지진이 쓰나미를 동반했고, 거대한 파도가 원전을 덮치면서 지진-쓰나미-원전 폭발의 연쇄 재난이 촉발됐다. 하필 일본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의 지진이 도호쿠 지방 부근에서 일어난 점, 하필 그와 가까운 연안에 원전이 지어졌다는 점, 그리고 하필 원전을 운영하던 도쿄전력이 지진과 쓰나미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점 등 자연재해와 인재가 섞여 복합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여러 단계의 ‘하필’이 겹치면서 누구도 그때, 그곳에서, 그 정도 규모의 재난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로봇이 준비돼 있을 리 없었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처럼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하러 ‘짠’ 하고 등장하는만능 로봇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쿠시마 사고 투입된 로봇, 방사선 노출에 작동 멈춰
재난 대응 로봇을 개발하는 일이 다른 로봇을 만드는 것에 비해 까다로운 이유는 사용될 현장을 미리 가늠해볼 수 없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는 로봇을 사용할 목표 환경이 뚜렷하다. 로봇이 공장·식당·창고 등에 투입되는 경우,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현장에 맞춰 설계할 수 있다. 또 건축법이나 공원법이 제시하는 숫자들을 로봇 설계의 지침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필요하면 로봇이 작동하기 수월한 방향으로 현장 환경을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재난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발생할지 알 수 없다.
재난 상황에 투입할 로봇은 어떻게 개발해야 할까? 미래에 일어날 재난을 정확히 예측하긴 어렵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재현할 수는 있다. 과거의 사건을 복기하고 그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대표적인 모조 재난 현장의 예로 미국 텍사스의 ‘재난 도시’를 들 수 있다. 재난 도시는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등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만든 재난 대응 훈련 시설이다. 6만평이 넘는 터에 탈선된 열차, 무너진 영화관과 쇼핑몰, 폭발물이 터진 버스와 같은 여러 구조물을 설치해 매년 수백명의 구조 인력이 모의 훈련을 진행하는 장소로 활용한다. 로빈 머피 텍사스 에이앤엠(A&M)대학 교수는 자신의 연구팀이 개발한 재난 로봇을 시험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돌무더기 사이의 작은 틈새나 좁은 터널처럼 사람이 진입하기 어려운 공간에 로봇을 부려 본다. 그리고 연구실로 돌아와 부족한 점을 보완한 뒤 다시 시험해보는 방식으로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로봇을 개발한다.
미국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다르파)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2013년부터 2년간 개최한 다르파 로봇 경진대회도 과거 재난의 일부를 본떠 만들었다. 대회는 원전에서 사고가 난 상황을 가정하고 이때 로봇이 수행할 만한 몇가지 임무를 과제 형태로 꾸몄다. 로봇들은 외부와의 통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가기’, ‘밸브 잠그기’, ‘잔해물을 돌파해 현장을 빠져나오기’ 등 여덟가지 과제를 얼마나 정확하고 빠르게 완수하는지 겨뤘다.
특정 사건을 재현하는 대신 재난 상황의 보편적인 풍경 일부를 뽑아 구현할 수도 있다. 검뿌연 연기와 먼지로 뒤덮인 실내, 울퉁불퉁한 지면 같은 악조건에서 로봇이 얼마나 능력을 잘 발휘하는지 평가해 기술 개발에 참고하는 것이다. 경북 포항에 있는 안전로봇실증센터의 모조 재난 현장이 그렇다. 실외 시험장에 계단, 경사로, 요철, 배수로 등의 장애물과 모래, 골재, 진흙, 암석 등의 험지를 조성했다. 실내 시험장에는 로봇 성능을 검증할 수 있는 국제 표준 장비들이 준비돼 있다.
’재난 상황 확장’ 상상력으로 대비해야
재난 도시, 다르파 로봇 경진대회, 안전로봇실증센터는 모두 통제 가능한 환경을 제공한다. 로봇공학자들은 여러 모조 재난 현장을 선택적으로 조합하고 배열하여 다양한 가상 재난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면의 거칠기를 조절하거나 장애물의 개수를 가감하여 시나리오의 복잡도를 제어함으로써 크고 작은 재난이 제작된다. 이런 방식으로 로봇을 시험할 수 있는 가상 재난은 끝없이 증식한다. 실험실에서 만든 로봇을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실제 재난 현장에 투입할 수는 없지만, 가상 재난에서는 즉각 사용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잘 만든 가상 재난이라도 실제의 것과 같을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재난의 원본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동안 여러 차례의 재난을 겪으며 모든 재난이 고유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역사 속 재난들은 항상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각자의 예외성을 지닌 채 등장해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었다. 어떤 재난은 우리가 그동안 안전하다고 믿어왔던 장소에 대해 질문하게 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믿음을 깨뜨리고 삶의 방식을 뒤돌아보게 했다. 재난에서 배우지 못할 때 우리는 더 큰 재난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미래의 재난은 분명 과거의 것과 다르다.
재난 대응 로봇을 개발할 때 필요한 자세는 경계심과 상상력이다. 우리가 조작한 대로 꾸며지는 가상 재난의 한계를 인식하고, 로봇이 가상 재난에서 주어진 임무 수행에 성공한다면 실제 상황에서도 잘 작동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또 상상력을 발휘해 재난의 세계를 넓히고, 확장된 재난의 세계 속에서 로봇의 역할을 찾아가야 한다. 로봇에 꼭 맞는 재난이란 없다.
과학기술학 연구자
국내 1호 로봇비평가.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로봇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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