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완주하면 맥주 무한 제공…초보·장애인 함께 달리는 베를린
베를린 하프 마라톤 체험기
지난 2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체코 프라하 등 유럽 도시 곳곳에서 하프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올 한해 마라톤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대형 이벤트였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도 하프 마라톤을 뛰기 위해 전세계 150여개국의 러너 3만5천여명이 모였다. 대회에 참여한 <한겨레> 노지원 베를린 특파원이 현장 소식을 전해 왔다.
올해 마라톤 여정 출발…시민들 자발적 응원
2023 베를린 하프 마라톤 당일인 2일 일요일 오전 9시. 베를린 지하철은 수많은 시민들로 북적였습니다. 휴일 오전 이른 시각, 운동복 차림으로 가슴에 번호표를 단 마라토너들이 모두 출발 지점인 브란덴부르크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영상 5도 안팎의 쌀쌀한 날씨에도 친구·가족들과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많았고, 혼자 이어폰을 귀에 끼고 비장하게 마음을 가다듬는 이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오전 9시30분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참여한 이들에 이어 핸드바이크(손으로 움직이는 세발자전거)와 휠체어를 탄 장애인 참가자가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10시5분, 프로 마라토너 그룹을 필두로 아마추어 러너들이 목표 기록이 빠른 순서대로 5개 그룹으로 나뉘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린 마라톤은 엘리트 선수와 아마추어 러너가 함께 뛸 수 있습니다.
달리는 무리 속엔 남녀노소, 초심자와 숙련자, 다양한 인종이 한데 뒤섞였습니다. 독일 신문 <타게스슈피겔>은 62살 치과 조무사가 올해 처음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고,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함께 뛴 가족도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달리는 사람 모두 완주가 중요했습니다. 21㎞ 하프 마라톤 출전이 처음인 저 역시 목표 시간을 2시간30분 정도로 넉넉히 잡았습니다. 1㎞당 7분 정도로 꾸준히 달려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베를린 전승기념탑과 브란덴부르크 문 사이에서 출발해 도시를 한 바퀴 도는 코스에 들어서자마자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이 쏟아졌습니다. 지인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 시민들은 초면의 러너들을 순수하게 응원하러 거리로 나왔습니다. 한 남성은 “힘을 내기 위해 여기를 누르세요”(Push Here to Power U)라고 적힌 손팻말을 달리는 이들에게 내밀었습니다. 러너들은 손팻말에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신나게 나아갔습니다.
마라톤은 참가자들만의 축제가 아닌 베를린 시민 모두의 즐길거리가 됐습니다. 작정하고 부부젤라 등과 같은 응원 도구를 챙겨 온 시민들로 거리는 시끌벅적했습니다. 마라톤은 이날 베를린 거리의 ‘거대한 볼거리’였습니다. 몇몇 시민들은 자기 집 발코니에 나와 마라톤을 지켜보며 늦은 아침을 먹었습니다. 어떤 커플은 마라토너들이 지나는 코스 길가에 캠핑의자를 펴고 앉아 차를 마셨습니다. 한 젊은이는 발코니까지앰프를 끌고 나와 음악을 크게 틀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이날 하루 거리의 악사가 됐습니다. 이들의 연주는 러너들에게 힘이 됐습니다.
마라톤 대회의 또 다른 볼거리는 이색 참가자입니다. 잉고(55)는 쫄쫄이 바지와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맸고 실바나(50)는 머리에 면사포를 둘렀습니다. “함께한 지 28년 됐고, 결혼한 지 61일째입니다.” 세바스티앙은 초록색 물뿌리개를 들고 뛰었습니다. <타게스슈피겔>은 “사회가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성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 “참가자들이 모두 자동차를 타고 달렸다면 아마 비명이 들리겠지만, 우리는 정반대의 경험을 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전했습니다.
재활용컵 활용 ‘환경 마라톤’…완주 메달 걸고 출근하는 사람도
러너들은 베를린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지난해 여성으로서 1시간5분2초의 신기록을 세웠던 영국인 아일리시 매콜건은 올해도 자신의 기록을 43초 앞당긴 1시간4분19초로 우승했습니다.
매년 9월에 열리는 베를린 풀코스 마라톤에서도 세계신기록이 자주 나옵니다. 케냐의 37살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는 지난해 2시간1분9초의 세계기록을 세우며 우승했습니다. 2018년 베를린에서 세운 자신의 최고 기록을 30초나 단축한 겁니다. 48년 역사의 베를린 마라톤이 배출한 세계신기록은 12회나 됩니다. 베를린 마라톤 코스는 평평하고 직선 구간이 많아 달리기에 좋습니다. 베를린 풀코스 마라톤 대회는 하프와 달리 아마추어 참가자를 추첨으로 결정할 정도로 인기가 많습니다.
베를린 마라톤은 더욱 특별해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주최 쪽은 이번 대회부터 러너들에게 플라스틱이 아닌 재활용 컵을 지급해 4만5천개 이상의 일회용 컵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프 마라톤이 끝나고 산더미같이 쌓였던 일회용품 쓰레기 더미도 사라졌습니다. 완주자에게 나눠주는 보온 담요도 재활용 소재로 제작됐고 기부 코너도 마련됐습니다. 4월 초 쌀쌀한 날씨 탓에 러너들이 마라톤을 끝낸 뒤 겉옷을 벗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주최 쪽이 이를 수거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하기로 한 겁니다.
이번 하프 마라톤에 등록한 3만5천여명 중 2만6천여명이 결승선을 끊었습니다. 저는 2시간31분44초의 기록으로 2만3935등을 했습니다. 완주자들은 모두 방송 송신탑, 빌헬름교회 등 베를린의 랜드마크가 박힌 금색 메달을 받았습니다.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 여러 차례 참가한 한 한국인 친구는 “완주 메달을 자랑스럽게 목에 걸고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마라톤이 끝난 뒤에는 참가자들에게 맥주의 나라답게 맥주가 무한 제공됐습니다. 무알코올 음료였습니다. 저도 두 잔을 들이켰습니다. 시민들은 자랑스럽게 메달을 목에 걸고 카페·식당·펍을 돌아다녔습니다. 길을 걷다 같은 모습을 한 러너를 만나면 눈인사를 했습니다. 완주의 환희로 가득 찬 이날 베를린은 온종일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베를린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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