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오픈런 대신 도시락 입고런…허세플레이션 꺾였다
주제 바뀐 '카푸어 방'…중고차 재고량 급증하며 역대 최대
MZ 골프인구 이탈…2030 골프웨어 쇼핑 클릭 수 반토막
“지난 3월에만 이 근처 필라테스센터 3개가 매물로 나왔어요. 회원이 줄어 버티지 못한 거죠.”
4월 10일 마포역 인근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가 한 말이다. 마포와 여의도 지역 직장인을 흡수하던 필라테스센터가 세 곳이나 매물로 나왔다. 지방에서는 이탈하는 회원을 채우기 위해 그룹 수업 1회에 6900원짜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6 대 1 그룹 수업은 서울에서는 1회에 3만원 정도 한다.
골프 시장에서는 2030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네이버 데이터랩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사상 최고를 찍었던 골프복 쇼핑 클릭 수가 올해 3월에는 반 토막 났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증했던 2030 골프 인구가 다시 빠져나가면서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는 골프 용품 매물이 급증했다. 비싼 그린피와 골프복, 골프 용품 등으로 인한 지출을 감당하지 못한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대거 이탈한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나타난 유동성 버블로 초래된 ‘허세플레이션(허세를 부리기 위한 비용이 상승하는 현상)’에 제동이 걸리는 분위기다. 불안한 미래 대신 현재의 행복과 과시 소비에 가치를 두던 젊은 세대가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허세플레이션은 유튜버 ‘부읽남’ 채널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외식은 오마카세, 주말엔 골프 라운딩, 1년에 2번 해외여행, 프러포즈는 샤넬백을 곁들인 호텔 스위트룸 등 값비싼 소비를 한 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랑하는 소비 행태를 말한다.
몇 년 전 한국을 휩쓸었던 ‘욜로’와는 또 다른 개념이다. 욜로가 한 번뿐인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 자신만의 가치에 집중한다면 허세플레이션은 전시하는 소비에 집중하는 삶이다. ‘남들처럼’은 살기 위해 평균을 상향 평준화하는 끝없는 ‘플렉스’에 가깝다.
주가·부동산·채권 등 자산 시장이 부진하자 허세플레이션이 꺼지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에 냉장고 요구하고 도시락 ‘입고런’
허세플레이션의 거품은 밥값에서부터 꺼지고 있다. 최근 편의점 점주들 사이에 ‘입고런’이라는 단어가 번지고 있다. 편의점에 도시락이 입고되자마자 팔려 나가는 현상이다. 한쪽에서는 1000만원짜리 가방을 사기 위해 백화점 앞에 줄을 서고 한쪽에선 편의점 도시락 입고 시간에 맞춰 달리고 있는 셈이다.
한때 프리미엄을 지향하던 편의점 도시락은 할인가를 적용해 2000~3000원짜리 초저가 식사로 돌아왔다. 외식 물가가 무섭게 치솟으며 ‘런치플레이션(점심 물가 상승)’이라는 말이 유행하자 ‘가성비’를 앞세운 전략으로 젊은 세대를 겨냥했다.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편의점업계에 따르면 한국 주요 편의점의 올해 도시락 매출은 평균 30% 넘게 늘었다. 한 편의점업계 관계자는 “직장인들이 많은 지역에서는 10~12시 사이 편의점 입고 트럭 시간에 맞춰 찾아온 손님들이 바로 도시락을 사 가는 ‘입고런’이 벌어지며 10~20분 만에 재고가 모두 소진되는 곳들이 많다”고 말했다.
고물가 점심값에 부담을 느낀 직장인들이 회사에 냉장고 설치를 요구한 기업도 있다. 한 대형 스타트업은 최근 재택근무 제도를 끝내고 사무실 출근으로 제도를 바꿨다. 회사 인사팀은 직원들에게 ‘사무실로 복귀하는 데 가장 필요한 복지가 무엇인지’ 조사했는데 1위가 냉장고 설치였다.
이 회사 관계자는 “도시락을 싸 오는 직원과 함께 편의점 도시락을 일찍 사다 놓겠다는 직원들이 꽤 있다”고 전했다. 점심시간에 가면 편의점 도시락이 매진되는 곳이 많아 일찍 사다 놓으려면 보관하는 냉장고가 더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중고차 재고량 최대…카푸어도 고통
“금리 어떻게 줄이나요. 꿀팀 좀 ㅠㅠ”
“이자만 천만 단위로 나가요. 미치겠어요.”
4월 12일 일명 ‘카푸어’들이 모인 단체 대화방. 그들의 주제가 바뀌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카푸어 방의 주제는 차 자랑이었다.
“나이 24세. 차량 맥라렌 720S. 선수금 4000만원, 나머지는 전액 할부. 금리 22%, 신용 등급 8등급 후반.”
“나이 27세. 차량 아우디A6, 캐피털 3사 전액 할부, 금리 29%. 신용 등급 조회하지 않음.”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각자 할부로 산 차를 자랑하기 바빴다. A가 고금리를 말하면 B는 보다 높은 최고 금리를 자랑했다. 마치 ‘차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실제 허세 인플레이션의 끝판왕은 ‘자동차’로 통했다. 수억원대에 달하는 자동차도 허세와 만나면 ‘풀할부 구매’로 소유가 가능했다.
자동차를 뜻하는 ‘카’와 가난을 뜻하는 ‘푸어’가 만난 ‘카푸어’는 허세 인플레이션의 실체를 보여주는 조어다. 자신의 수입이나 자산에 비해 비싼 차를 구입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한 달 수입의 80% 이상을 차량 할부와 유지비에 쓰더라도 외제 차를 포기하지 않았다. ‘월 238만원 내는 포르쉐 카푸어의 현실’, ‘할부금 내려고 배달 투잡까지’ 등의 콘텐츠들이 큰 인기를 끌며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카푸어들이 달라졌다. 최근 카푸어를 주제로 모인 커뮤니티에서는 실제 카푸어보다 차 구매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들은 ‘예정’이란 닉네임을 달고 금리 인하를 기다리는 중이다.
반면 차를 구매한 이들은 푸념이 가득하다. 벤츠 SL63 AMG를 보유한 C 씨는 “이자만 연 1000만원 단위로 나간다”며 “이자를 내기 위해 배달(알바)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BMW X6 차주인 D 씨는 “요즘 이자 내느라 돈이 없어 컵라면도 작은 것을 먹는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카푸어들이 모인 단체 대화방에서는 1주일 내내 새로운 차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금리에 대한 걱정과 푸념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화방을 장식했다.
차량 구매의 벽이 높아진 원인은 ‘고금리’다. 불과 1년 새 2배 이상 오른 고금리의 할부 이자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실상 ‘오를 나무’가 없어졌다. 차 구매를 고민 중인 E 씨는 “1년 전만 해도 금리가 2.7%였는데 현재 6.2%로 높아진 금리로 5년을 낼 것을 생각하니 망설여진다”며 “한 달 기준 11만원, 5년간 1000만원을 이자로 더 내야 하는 데 부담감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여신금융협회 공시 정보 포털에 따르면 신용 1등급(900점 초과)인 소비자가 중고차를 36개월 할부로 구매하면 최고 19.90%, 최저 8.90% 금리를 적용받는다. 이마저도 ‘1등급’인 경우다.
중고차 시장에도 한파가 불고 있다. 딜러들 역시 중고차 매입을 위한 대출 부담이 커지면서 올 초부터 매입을 멈춘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중고차 거래량은 지난해 3월 34만1000대를 기록했다. 12월에는 28만6000대로 10개월 동안 약 16% 감소했다. 연중 최저치다. 반면 중고차 재고량은 급증했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중고차 재고(딜러 매입 대수-판매 대수)는 14만9700대로 6만3800대였던 2021년에 비해 135% 늘었다. 역대 최대 규모다.
백화점 명품 성장률도 꺾였다
끝날 것 같지 않던 한국 명품 시장의 성장세도 둔화됐다. 1년 전과 비교하면 백화점 3사의 명품 매출 증가율은 완벽하게 꺾였다. 백화점 3사의 명품 성장률이 지난해 1분기에 모두 30% 이상 성장했는데 올해는 3사 모두 한 자릿수 성장에 그쳤다.
백화점업계에 따르면 롯데백화점은 명품 매출이 지난해 1분기 대비 7%, 신세계백화점은 7.8%, 현대백화점은 9.1% 각각 늘어났다. 해외여행이 폭발하면서 소비자들이 명품을 살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해졌고 명품업계의 연이은 가격 인상도 명품 성장을 주춤하게 한 요인으로 꼽힌다.
‘명품 애플리케이션(앱)’ 월간 이용자 수 역시 1년 만에 반 토막 났다. 이커머스업계에 따르면 온라인 명품 플랫폼 3사, 머스트잇·트렌비·발란의 앱 사용자 수는 최근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앱·리테일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에 따르면 지난 3월 주요 명품 커머스 앱 사용자 수는 78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9% 감소했다. 이 앱 이용자 대부분은 젊은층이다.
고금리·고물가로 소비자들의 쇼핑 지갑이 닫힌 게 가장 컸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년 동월 대비 소매판매액지수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6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의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지난해 6월부터 올해 3월까지 10개월째 기준값(100)을 밑돌았다. CCSI가 기준값보다 작으면 소비자의 경제 상황에 대한 심리가 장기 평균보다 비관적이라는 의미다.
소비 위축으로 명품 매출 성장이 둔화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면서 올해 주가 역시 하락세를 그리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4월 11일 신세계의 목표 주가를 33만원에서 30만원으로 내렸다. 더딘 경기 회복을 반영해 백화점은 물론 가구와 패션 등 주요 자회사 실적을 하향 조정했다는 설명이다. 현대백화점에 대해서도 전날 흥국증권이 목표 주가를 10만원에서 8만3000원으로 낮춰 잡았다.
“플렉스 문화, 잠시 주춤할 뿐”
허세플레이션이 가능했던 비결인 ‘무이자 할부’도 축소되고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신한·삼성·KB국민·현대·롯데·우리·하나카드 등 대부분의 카드사는 6개월 이상 무이자 할부 서비스 기간을 3개월로 축소했다. 금리 상승으로 무이자 할부 서비스에 따르는 비용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국기업평가는 카드사들이 올해 한 해 동안 부담해야 하는 이자 비용만 1조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이미 막다른 길에 놓인 MZ세대도 많다. 대출 금리 인상이 지속되며 빚으로 빚을 막는 다중 채무자는 4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이들 중 31.7%(141만9000명)가 30대 이하다. 30대 이하 다중 채무자는 2019년 말 126만6000명에서 3년 만에 15만3000명 늘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이후 주식과 암호화폐 투자 열풍이 분 것 외에도 사치 소비가 만연했던 것이 다중 채무의 원인으로 꼽힌다. 이들은 은행뿐만 아니라 저축은행 등 2금융권에서 돈을 빌린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자도 많이 낸다.
전문가들은 허세플레이션이 과잉 유동성의 시대에 탄생했다가 고금리·고물가에 사그러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주식과 비트코인, ‘영끌’ 주택 등의 금리 인상으로 젊은 사람들의 자산 가치가 많이 축소됐다”며 “현 상황에서 도저히 이전의 소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경제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무이자 할부 혜택이 사라지고 금리 인상으로 할부 금리가 폭등하면서 소비 지표가 하락세를 그렸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자산 가치가 다시 오르거나 개인의 사정이 나아지면 허세플레이션은 언제든지 고개를 들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과시욕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앤드컴퍼니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응답자의 22%만이 사치품을 과시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반면 중국인은 38%, 일본인은 45%가 명품을 과시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답했다.
조사 결과는 한국 사회에서 부를 과시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용인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 투자은행인 모간스탠리도 한국의 명품 수요가 급증한 원인으로 과시욕과 코로나19 사태 이후의 자산 가치 상승을 꼽았다. 이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명품 소비 시장 규모는 168억 달러(약 21조원)로 전년 대비 24% 성장했다. 인구수로 환산하면 1인당 325달러(약 40만원)로 중국과 미국의 1인당 지출액인 55달러, 280달러를 훨씬 웃도는 금액이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명품 지출액은 중국인보다 6배 이상 높다.
모간스탠리 애널리스트들은 한국 구매자들의 명품 수요는 구매력 증가와 사회적 지위를 겉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보고서에서 “외모와 재정적 성공은 다른 국가보다 한국 소비자들에게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코로나19 시대 자산 가치의 상승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가계 순자산은 11% 증가했다. 한국 가계 자산의 약 76%는 부동산인데 2020년 이후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자산 가치가 상승했다는 것이다. 실제 2022년 3월 말 기준 가구당 평균 자산은 5억4772만원으로 전년 대비 9.0% 증가했다.
전년보다 금융 자산은 7.1%, 실물 자산은 9.5% 증가했다.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금융 자산보다 실물 자산 증가율이 가팔랐던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부채는 2022년 3월 말 기준 가구당 평균 9170만원으로 전년보다 4.2% 증가했다.
하지만 금리 인상으로 가구별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자산 가치의 버블 현상도 꺼지고 있다. 소비 문화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필라테스의 폐업, 중고차 재고량 역대 최다, 중고 시장에 골프 용품 매물 급증 등의 사례가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다.
문화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정지우 변호사는 코로나19 사태로 집중됐던 물질 소비가 긴축 경제에 따라 종료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 변호사는 "최근 벌어지는 소비의 양극화를 묶어서 해석할 경우, 여행과 골프에 대한 수요변화는 모두 코로나19로 인한 차단과 해제의 영향이라면, 명품 구매를 자제하고 런치인플레이션에 따른 식사비를 줄이는 것은 물가상승 및 금리인상에 따른 이자부담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동안 금지됐던 해외여행만큼은 특별한 경험추구의 마지노선으로 남겨두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동안 ‘욜로’가 휩쓸며 경험과 가치 추구에 집중하던 소비는 감염병으로 여행·모임·취미 활동 등 경험을 추구할 수 있는 활동이 모두 금지되면서 ‘물질 소비’로 옮아 왔고 버블의 종료가 다가오면서 물질 소비 역시 종료를 맞았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소비 문화는 더욱 양극단을 달릴 것으로 보인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23’을 통해 2023년의 10대 소비 트렌드 키워드 중 첫째로 ‘평균 실종’을 꼽았다. 일반적인 소비 패턴은 평균인 중앙이 제일 많고 멀어질수록 빈도가 줄어드는 완만한 종 모양이다. 하지만 사회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이런 평균이 실종되고 있다. 현대판 보릿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점점 지갑을 여는 데 까다로워지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플렉스’ 열풍에 따라 극단의 사치스러운 소비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은희 교수는 “자산 가치가 다시 오르거나 개인의 사정이 나아지면 허세플레이션은 언제든지 고개를 들 수 있다”면서도 “최근 고물가·고금리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요즘 젊은 세대에서도 미래를 대비하는 소비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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