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위 그만하고 싶어요” 소년 고백에…칼날 든 속옷을 건넸다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4. 15.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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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17] 소년은 종일 마음이 무겁습니다. 어젯밤 문득 욕정이 일어 ‘수음’(자위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웃 마을 처녀를 생각했기에 죄책감은 더욱 컸었지요. 꽃과 동물을 사랑했고, 종교에 신실했던 그였습니다. 신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늘 되새겨 왔었기에 스스로를 더욱 용서할 수 없었지요.

날이 밝자 그는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겸허히 고백합니다. “목사님, 제가 수음의 죄를 범했습니다.” “회개하라 주님의 어린 양이여, 너를 용서하노라, 다만 이걸 차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도록 하게.”

“제가 어젯밤에 음탕한 죄를 지었어요 흑흑”. 주세페 몰테니의 ‘La Confessione’(고백) 1838년 작품.
소년은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건넨 속옷 안에 날카로운 칼날이 ‘그곳’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목사님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우발적인 ‘사고’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네.”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18세기 영국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 자위행위는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큰죄였습니다. 신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지요. ‘자위’는 악마의 속삭임과 진배없었지요. 그렇다고 역사 속에서 ‘손 장난’이 늘 소박만 맞았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숭상한 시기도 있었지요. 자위의 역사를 사색합니다. 마침 곧 솔로들을 위한 블랙데이(4월 14일)가 찾아옵니다.

자위행위를 묘사한 에곤 쉴레의 자화상(1911년).
기독교가 불러온 ‘자위혐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스스로를 사랑하는 행동(?)이 저주를 받기 시작한 건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중세부터 근세까지 유럽에서 자위는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행위였습니다. 기독교가 유럽의 종교로 자리 잡은 이후, 그들은 시민들의 성을 통제하는 미시권력이었지요. ‘정욕=원죄’와 같은 것이었고, 성적 욕망이란 어떻게 해서든 통제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부부간의 성관계가 아닌, 오직 쾌락만을 위한 자위행위라니요. 큰 죄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자 동작그만 이제 좋은 시절 다 갔습니다. 성적인 방종을 멈추시오”. 기독교 교리를 확립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운데)와 교부를 묘사한 그림.
그러나 중세 시절에는 자위행위가 ‘필수 악’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독일 보름스 지역의 신학자였던 부르카르트가 11세기 편찬한 ‘교령집’의 내용입니다. “수음한 남자는 10일에서 20일간 빵과 물만 먹는 참회 고행을 하여야 한다.”

열흘 동안 두 가지만 먹는 게 고역이라면 고역이겠지만, 대수롭지는 않은 처벌이었지요. 죄로 규정된 다른 행위의 처벌 강도만 봐도 그렇습니다. 구강성교에는 3년의 참회 고행이 따랐습니다. 부부관계 시에 정상위(남성이 위로 가는 성행위)가 아닌 자세로 해도 마찬가지로 3년이었지요. 자위행위가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용인될 행위로 봤다는 방증입니다.

역사학자 캐서린 하비는 “젊은 청년들에 욕망을 무작정 틀어막을 경우, 강간과 같은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같은 이유로 기독교는 매춘에도 눈을 감았지요.

313년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중세 유럽에는 성적인 규제도 함께 시작됐다. 사진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묘 교회. <사진 출처=플리커, 저작권자=Jorge Lascar>
“전염병은 성적 방종이 원인”…거세지는 자위 비난
“흑사병은 방종한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

‘자위’ 용인이 영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사회가 점점 보수화되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중세초까지만 해도 자위는 성당의 말단 신부가 처리해야 할 정도로 작은 죄였습니다. 하지만 14세기가 되는 중세 중기 이후부터는 자위는 심각한 죄로 여겨지지요.

“지금 이 위기는 우리의 성적 방종에 신이 분노했기 때문이라네.” 14세기 프랑스 신학자 장 제르송. 베르나르 피카르가 1714년 그린 작품.

1380년대 프랑스에서는 ‘대주교’가 직접나서 자위의 고해를 직접 듣고 참회고행을 지도하라는 지침이 내려옵니다. 그만큼 이를 심각하게 봤다는 의미지요.

파리 대학 학장이었던 신학자 장 제르송은 자위 행위자들로부터 고해성사를 듣는 방법에 관해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위를 “혐오스럽고 역겨운 범죄”라고 규정했지요. 서유럽 인구의 3분의 1 인구를 앗아간 흑사병의 창궐이 보수적인 분위기를 이끄는 배경이 됐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인류를 하나님이 심판한 것”이라는 기독교적 해석이 먹혀들어 갔던 셈이죠.

벨기에 투르나이 지방에서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묻고 있는 걸 그린 모습. (1353년 작품)
자위는 신의 선물이라 했던 (아름다운) 그 시절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기 이전 시기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때는 자위가 용인의 수준을 넘어 숭배 행위로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수음을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정액은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에헤 그거 나쁜 짓아니고 신성한 일이라니까 그러네”. 수메르 신 엔키 조각상. 구바빌로니아 시대인 기원전 2004-1595년 추정 작품. 바그다드 이라크 박물관 소장품.
신화 속, ‘정액 숭배’가 곳곳에 묻어납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로 가봅니다. 문명의 젖줄이 되어 준 것은 바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선물한 비옥한 토지였지요. 그리고 이 강을 만든 건 엔키 신의 ‘자위행위’로 부터였습니다.
“물의 신 엔키가 자신의 물건을 꺼내더니 흔들기 시작했다. 절정의 순간, 그곳에서 봇물이 터지터니 이내 강을 이뤘다. 후대인들은 이를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 불렀다.”
수메르 사람들이 얼마나 ‘수음’을 경건한 행위로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집트의 창조신인 아툼 역시 자위행위를 통해 탄생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후대인들 사이에선 이집트의 파라오가 나일강에서 의무적으로 ‘공개 자위행위’를 했다는 풍문이 있는데, 이는 헛소문입니다) 중세 유럽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던 셈입니다. 고대 그리스 또한 자위를 자연스럽고 건강한 행위로 여겼지요. 그들은 도자기에 정령 사티로스를 그려 넣으면서 자위행위를 묘사하곤 했습니다.

“이건 성(性)적인 행위가 아니라 성(聖)스런 행위라네”. 고대 그리스 도자기에 묘사된 자위행위. <<저작권자=루이스 가르시아>
이성의 빛이 내리 쬔 계몽의 시대…그런데 자위혐오는 거세졌다
마침내 유럽에 계몽주의가 찾아옵니다. 이성이 종교의 맹목적인 믿음을 밀어내던 시기였지요. 자위행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저주의 언사에도 드디어 볕이 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짙은 암흑 속으로 들어가지요. ‘자위행위’를 비난하는 일련의 책들이 유럽의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면서였습니다.
‘오나니아- 혹은 극악무도한 자기오염의 죄’ 1722년 판본.
1712년, 영국의 출판계가 들썩입니다. ‘오나니아- 혹은 극악무도한 자기오염의 죄’라는 책 때문이었습니다. 한 외과 의사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에는 자위에 대한 신랄한 비판들이 그득했지요. 한 대목을 살펴볼까요.
“자위행위를 즐기는 이들은 간질, 히스테리, 턱관절 질환에 시달릴 것이다. 정자가 퇴화된 나머지 병든 아이를 낳거나, 자살하게 된다.”
책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 갑니다. 특히 가톨릭의 성적 방종을 비판하면서 태동한 개신교 국가에서 더욱 더 큰 인기를 얻었지요. 종교개혁의 아버지인 루터는 “자위는 낙태와 같다”고 했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도 자위를 대죄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책은 1730년까지 1만 5000부가 팔려 국제적 ‘베스트셀러’로 발돋움합니다.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에 퍼져 나갔을 정도였지요. 대서양 건너 미국에까지 안착합니다.
“자위는 대역죄!! ”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종교개혁을 이끈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도 자위 혐오자 중 하나였다. 그는 마르틴 루터 등 개신교 신학자들에 영향을 끼쳤다. 화가 프라 바르톨로메오가 그린 1497년 초상화.
베스트셀러가 된 ‘자위혐오’
스위스 출신의 사무엘 오귀스트 티소 박사가 쓴 문제적 저작이 이를 계승합니다. ‘오나니즘: 자위를 통해서 유발되는 질병에 관하여’입니다. 오난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형사취수 문화에 따라 죽은 형을 대신해 형수와 결혼했으나, 피임을 한 죄로 죽음을 맞이하지요. 성경 속 오나니즘은 정확히 말하면 성교중절(질외XX)을 의미하지만 이 저작 때문인지 자위행위를 일컫는 말이 됐었지요.
“그 자위는 말이야, 일종의 자살행위나 다름없지.” 사무엘 오귀스트 티소. 스위스 화가 안젤리카 카우프만이 그린 초상화 1783년 작품.
스위스에서 진료 활동을 통해 티소 박사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자위는 소화기와 호흡기의 약화, 불임, 류머티즘, 종양, 임질, 음경 지속 발기증, 실명, 정신이상의 원인.”

티소 박사는 한 환자의 뇌를 관찰하더니 “뇌가 말라버려 썩은 호두알처럼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고 진단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자위로 인한 정액의 과도한 유실로 규정해 버립니다. “정액 1온스의 손실은 혈액 40온스의 손실과 같다”는 명언도 남겼지요.

1785년 티소 박사의 저작 오나니즘에 의해 생기는 질병에 관한 논문. 이탈리아판본(1785년)
위대한 철학자 루소와 디드로도 자위혐오론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유명한 친구들이 그의 저작을 ‘추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계몽 철학자 루소와 디드로였지요. 디드로는 ‘백과전서’의 저자입니다. 그는 저서에 “수음은 손을 통한 범죄”라고 명시했지요.

루소 역시 ‘에밀’과 ‘고백론’에서 “자위는 정신적 강간”으로 규정합니다. 당시는 계몽주의가 유럽 전역에 퍼지던 시기였고, 교훈적 수필집이 열광적으로 팔리던 시대였지요. 오늘날 전문가들의 자기계발서가 퍼지던 것처럼요. 자위는 구원받기 힘든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자위는 나쁜 것이라고 사전에 쓰여있지. 물론 내가 쓴 것이네.하하”. ‘ 백과전서의 저자 데니스 디드로의 초상.
미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지요. ‘자위행위’는 끔찍하고 교정되어야 할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 그 중에서도 더 보수적인 이들이 모였다는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은 법령으로 자위행위자를 사형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했지요. 그들에게 자위행위는 ‘신성모독’ 혹은 ‘동성애’와 같은 중죄였던 셈입니다.

유럽에서 자위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정조대가 끊임없이 개발되던 것도 이시기였습니다. 코르셋 모양으로 성기를 조여주는 게 있는가 하면, 날카로운 칼날이 성기를 둘러싸 음탕한 생각을 원천 봉쇄하는 정조대도 있었지요.

1911년 특허 출원된 잠글 수 있는 남성용 자위방지 벨트.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팬티 속에 상어도 아니고...” 19세기 영국 의학자 존 로 밀턴은 ‘병리학과 몽정의 치료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자위와 몽정을 억제할 수 있는 기구를 고안한다.
청소년들의 자위를 막기 위한 사회적 운동도 이뤄집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스카우트’에서였습니다. 스카우트 설립자인 로버트 베이든 포웰은 1914년 스카우트 소년을 위한 책자에서 자위행위에 위험에 대한 경고하는 구절을 (기어이) 적어 넣었지요. 그는 “신체 활동을 왕성히 함으로써 유혹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은 16년 후인 193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삭제되기에 이르렀지요.
“선생님, 저흰 그런 거 몰라요.” 국제보이스카우트 연맹 사진. 2002년 미국에서 촬영된 사진. <저작권자=Rlevse >
과학의 이름으로 자위구하기에 나선 학자들
“자위는 죄가 없다.”

자위행위에 대한 일련의 저주를 걷어낸 이들은 역시 과학자였습니다. 생물학자 해브록 엘리스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는 1897년 “건강한 개인이 어느 정도 자위행위를 한다고 해도 심각히 해로운 결과가 반드시 뒤따르지는 않는다”고 (지극히 당연한 말씀을) 선언하지요.

“자위는 건강에 해롭지 않습니다. 엣헴” 헨리 해블록 엘리스(Henry Havelock Ellis , 1859년 2월 2일 – 1939년 7월 8일)는 인간의 성을 연구한 영국의 의사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상 과학자 알프레드 킨지는 그 유명한 현대인의 성생활을 조명한 1948년 ‘킨제이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자위행위는 남성과 여성에게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발표가 있은 뒤에서야 자위행위는 더 이상 병으로 취급되지 않기에 이르렀죠.

미국의학협회의 자위행위를 “정상적인 것”으로 선언합니다. 1972년이 되어서야 이뤄진 ‘해방’이었지요. 로마제국 멸망 이후 인류는 1700년 동안이나 눈치를 보며 자위를 했었던 셈이지요. 1995년에는 ‘국제 자위의 날’(5월 7일)이 제정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정형외과 의사 잘라드 라퐁이 고안한 자위 방지용 코르셋. 과학자들의 연구가 없었으면 우리는 아직도 이 의상을 차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 현대인들은 죄책감 없이 ‘손장난’을 즐길 수 있습니다. 즐거움은 우리의 몫이지만,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투쟁을 이어 온 과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생각하면서, 모두 각자만의 행복한 시간을 가지시길. 4월 14일은 솔로들을 위한 블랙데이입니다.
“선생님들 투쟁에 감사를 드립니다, 헤헤.” 영화 ‘몽정기’ 한장면.
<참고문헌>

ㅇ이시카와 히로요시, 마스터베이션의 역사, 해냄, 2002년

ㅇ제프리 리처즈, 중세의 소외집단-섹스·일탈·저주, 느티나무, 1999년

ㅇ알랭 코르뱅 외, 몸의 역사2, 길, 2017년

<네줄요약>

ㅇ고대 신화에서 ‘자위’는 탄생신화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신성한 행위로 여겨졌다.

ㅇ중세 유럽에서 기독교가 들어서면서 ‘자위’가 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ㅇ계몽주의 시절에는 ‘자위’가 죽음에 이끄는 길이라고 설명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칼날 찬 자위 방지 정조대도 개발된다.

ㅇ과학자들의 “자위는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발표가 수십년간 이어져서야 자위는 해방됐다. (우리가 즐거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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