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을 두려워한 철학이 유대인 천재들을 낳았다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유명한 독일 물리학자 바이체커는 하이데거의 강의를 듣고 충격을 받은 채 중얼거렸다. “바로 이것이 철학이다. 나는 그의 말을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것이야말로 철학이다.” 우리를 매우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고백이다.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확신을 주는 분위기는 철학 강의보다는 부흥회에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확실히 1930년대 유럽에서는 ‘하이데거 컬트’라고 부를 만한 열광의 흐름이 형성됐고 그 출발점은 1927년 하이데거의 첫 책 '존재와 시간'의 출간이었다.
그 무렵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블랑쇼와 환대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이었다. 둘은 같은 대학에 다니며 함께 철학과 문학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레비나스가 독일에서 막 출간된 하이데거의 책을 가져와 블랑쇼에게 읽어보자고 권했고, 그렇게 시작된 독서는 두 사람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레비나스는 곧바로 새로운 지적 진원지를 찾아 하이데거가 있는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블랑쇼는 평론가로 유명해진 이후에도 그 책과의 강렬한 만남을 종종 언급했다.
한 그래픽 노블 작가는 하이데거의 강의 출석부를 ‘천재들의 명단’이라고 표현한다. 출석부에 적힌 이름들을 살펴보면 과장이 아니다. 요나스, 스트라우스, 마르쿠제, 뢰비트, 레비나스, 아렌트…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출석부는 현대 사상사를 빛낸 걸출한 ‘유대인’ 천재들의 명단이다. 이후 이들의 관심은 환경철학, 정치철학, 윤리철학, 정신분석학 등으로 다양하게 뻗어 나갔고 정치적 입장도 좌파사상가, 신보수주의자 등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하이데거의 가장 진지하고 열정적인 학생들이었다는 점에서만큼은 하나로 묶일 수 있다.
'존재와 시간'은 획기적인 책이다.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존재란 무엇인가’였다. 하이데거는 이 책에서 선배 철학자들의 존재 탐구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고 과감하게 선포한다. 그들의 진지한 질문과 나름대로의 답변이 적중했다면 서구 문명이 이토록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1890년에서 1920년대까지 유럽에는 ‘세기말’과 ‘데카당스(퇴폐)’라는 말이 유행한다. 유럽 대륙 전체가 낡고 지루한 곳이라는 느낌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차올랐다. ‘무슨 일 안 생기나?’ 이런 기분이 젊은이들 사이에 퍼질 무렵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따분한 삶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모두가 흥분했지만 전쟁의 실상은 참혹했다. 과학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량살상을 가능케 했고,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명 전체가 커다란 위기에 빠졌음을 실감한다. 한 시인의 조롱 섞인 표현에 따르면 “서양문명은 실패작, 이빨 빠진 늙은 개”였다.
하이데거는 이런 위기감 속에서 20대를 보냈다. 독일 남부에서 성당지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아름다운 유년 시절을 보낸 젊은이였다. 고향을 떠나와 접하게 된 유럽 대도시의 산업문화가 그에게 끔찍한 느낌을 주었던 것일까?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분주하고 획일적인 도시의 대량화된 인간 군상을 ‘세인(世人, 남들)’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가 ‘남들이 그래’라고 하며 세상 사람들을 막연하게 칭할 때 사용하는 일상어를 철학 개념으로 쓴 것이다. 이 책에는 잡담, 불안, 기분, 마음 씀 같은 단어들도 등장한다. 전통적인 철학 개념 대신 일상어들을 철학적 용어로 가져온 시도는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무척 힙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존재와 시간'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실존적 존재”이다. 이 존재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세인의 통치에 놓이게 되고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왜 그토록 쉽게 내려놓을까? 남들과 같은 삶의 매뉴얼을 따르면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세인은 개개인을 “존재 부담 면제”의 상태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불현듯 현존재는 자신을 잠식하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 불안의 기분은 그가 그동안 견지해온 삶의 확실성을 붕괴시키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그 기분을 받아들이는 순간 현존재에게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고 말한다. 낯설고 섬뜩한 기분의 한가운데서 현존재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시인 릴케는 노래했다. “오 신이여, 우리에게 저마다의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 하이데거는 릴케가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자신은 철학적 사유로 반복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릴케의 열혈 독자였다. 시인이 말한 ‘저마다의 고유한 죽음’을 철학자는 이렇게 풀어낸다. 우리가 아무리 세인의 방식을 따라 산다고 해도 죽음만큼은 타인이 대신 겪어줄 수 없는 사건이다. 물론 사고 현장의 의인, 재난 현장에서 아이를 지키려는 엄마처럼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 죽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한 존재를 죽음에서 완벽하게 지켜내지는 못한다. 엄마가 구한 아이도 영원히 살 수는 없으니 말이다. 죽음만큼은 각자가 직접 겪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하이데거는 죽음 앞에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에게 자신의 삶이 완료되는 순간인 죽음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그 순간으로 미리 달려가서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실감하게 될 때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내가 진실로 원하는 삶을 향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의 선구’를 통한 ‘기투’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기 위해 독창적인 죽음론을 펼치는 부분은 '존재와 시간'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지만, 사실 현대 이론가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그 결론에 이르는 데 동원된 디테일들이다. 가령 ‘불안'(Angst)과 ‘두려움'(Furcht)의 구분 같은 것. 호랑이가 두렵다. 강도가 두렵다.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두려움에는 대상이 있다. 일상적으로는 입시 불안, 실직 불안처럼 이유와 대상이 분명할 때도 불안이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하이데거의 구분에 따르면 이것들은 두려움에 해당된다. 이와 달리 근본적인 불안은 대상이 모호하다. 그런데 이탈리아 철학자 비르노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이 구분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상 없는 불안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세계가 불확실하고 미결정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특정 대상을 위험한 것으로 지정해서 모호한 고통을 확실한 고통으로 바꿔버린다. 명확한 경계의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것만 제거하면 세계는 다시 확실하고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저 동양인은 걸어다니는 바이러스야.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하고 이들만 사라지면 사회가 안전하고 건강해질 거라는 감정적 방어책을 만들어내면서 타인에 대한 잔혹한 반응들이 잇따르게 된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각종 학살은 대부분 불안 회피용 방어책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 심오한 통찰은 정작 통찰을 제공했던 철학자에게서는 망각된 것 같다. 하이데거는 유대인들을 기술진보에 앞장서며 현대인의 자기소외를 만들어내는 범죄행위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기술 문명이 주는 막연한 불안을 유대인이라는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함으로써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는 고향과 같은 대지를 만들기 위해 나치즘에 동조했고 유대인 학살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하이데거의 출석부에 적힌 이름의 주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선생의 입술을 통해 세상에서 추방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이데거 이후의 현대 철학은 이 젊은이들이 깊은 고통과 환멸에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절망적인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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