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협의체는 외교 인프라... 지방정부, 국가 교류 이상의 역할"[지방시대 지방외교]
49개국113개 회원 협의체 성장 불구 '21년 해체
"다자기구 설립 대 '확장성' 신경써야 지속가능"
“그걸 왜 대전이 하느냐.”
과학도시 대전은 지방외교에서 ‘너무’ 앞서갔던 도시다. 다른 지자체들이 해외 도시와 자매ㆍ우호협력의 양자 관계를 맺을 때 세계과학도시연합(WTA)이라는 다자협의체를 구축했다. 전 세계 도시를 대상으로 국내 지자체가 만든 최초의 협의체였다. 그러나 지자체가 세계 과학도시들을 모아 놓고 세금을 쓴다는 이유로 정부에서 감사를 받았고, 그 여파로 추진 동력이 약화하면서 2021년 2월 결국 해체됐다. 1998년 9월 출범 당시 20여 개 회원으로 시작한 WTA는 49개국 113개 회원을 거느린 글로벌 협의체로 성장한 터였다. 세계 각국 지방정부들이 경쟁적으로 협의체 조직에 나서고, 세계 패권 경쟁 격화로 국가 외교 운신의 폭이 좁아진 상황을 고려하면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지방외교가 다층적 다원적 외교의 주요 수단으로 부각되면서 각국은 지방외교를 국가외교와 연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택구(57) 대전시 행정부시장은 14일 “각 지자체가 해외 지방정부와 양자 관계는 기본으로 가져가고, 지역 특성을 살린 다자협력 틀을 만들어야 더 큰 성장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국가로 성장한 만큼, 각 지자체도 그에 걸맞게 국제교류ㆍ협력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WTA를 출범시킨 뒤 흥망성쇠를 지켜본 그로부터 한국의 지방외교 전략을 들었다. 행정고시 36회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93 대전엑스포를 계기로 세계 과학도시 협력 개념을 처음 세운 주인공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1998년 다자협의체 설립 계기는.
“대전의 국제협력 사업을 봤더니, ‘지방외교’ 단어를 쓸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단순한 교류였다. 다른 뭔가를 더해야 대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 엑스포가 끝난 뒤였고, 대덕연구단지 조성 20년이 되던 때였다. 과학기술도시 특성을 살려 해외 도시들과 뭉치면 더 발전적 교류가 가능할 것으로 봤다.”
-국제기구 설립이 쉽지 않았을 텐데.
“당시 홍선기 대전시장이 보고를 받고 즉석에서 결재했다. 1995년에 심포지엄을 열어 다자간 국제교류 실현 가능성을 확인했고, 97년에 테크노폴리스 서밋이라는 과학기술도시 시장회의를 열어 국제기구 결성에 합의했다. 98년에 총회를 거쳐 WTA가 공식 출범했다.”
-WTA는 무슨 활동을 했나.
“대덕사이언스파크(옛 대덕연구단지) 같은 연구단지를 가진 도시들끼리 모여 지속 가능하고 포괄적인 혁신을 목적으로 교류했다. 2006년엔 유네스코로부터 공식 NGO로 승인받아 세계혁신포럼 등 국제공동협력사업을 했다. 회원도시의 비즈니스 활성화를 위한 기술전시회(테크노마트, 하이테크페어)도 열었다. 151개국 2,447개 기업이 참가해 수출상담 2,276건, 계약 체결 3,967억 원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국제저널(WTR)도 발간했다.”
-성과를 놓고 보면 없어질 이유가 없어 보인다.
“중앙부처 차원에서도 하기 힘든 걸 지자체가 해낸 것이다. 과학기술부도 WTA 비전에 호응해 3억 원씩 3년 동안 국비를 지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제로 10년 정도 교류하다 보니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유수의 과학도시가 모였지만 새로움이 없었다.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그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나.
“분명 위기였지만, 10년 정도 WTA를 끌고 가다 보니 혁신도시나 과학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던 중동,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 도시들이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쳐 내려고 했는데, 이들이 WTA 회원들의 발전 경험을 공유하길 희망했다. 덜 혁신적이었지만 국가 발전에 기여하려는 도시에 우리 경험을 공유하는 것도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될 수 있다고 봤다. WTA 비전을 약간 틀어서 새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을 통해 다시 동력을 얻었다.”
-그런데 정작 위기가 우리 내부에서 온 건가.
“WTA가 출범한 지 15년 정도 되고 보니, '왜 지방정부가 그런 데다 돈을 쓰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다 보니 감사원과 행정안전부에서 감사가 들어왔다. 중앙정부도 못한 걸 지자체가 하고 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법적 근거 운운하며 때리기 시작했다. 투자 대비 수익이 얼마나 되는지 추궁하는 경우도 있어 정말 답답했다. 국제기구가 돈을 벌진 않는다. 다자협의체는 도로 같은 인프라다. 그걸 통해 사람들이 오가면서 사업을 해 각자 돈을 버는 것이다. 통행료를 받기 시작하면 조직을 키우기 힘들다.”
-당시 대전시가 UCLG 플랫폼으로 갈아타기 위해 WTA를 해체했다는 분석이 있다.
“UCLG도 좋은 플랫폼이다. 그렇지만 UCLG 총회 유치는 단발성 행사를 유치한 것에 불과하다. UCLG는 세계 지방정부 연합체라 일반적인 주제를 다루고, WTA는 미션이 특화돼 있는 전문적인 협의체라 상호 대체 관계도 아니다. UCLG 대전 총회 때 WTA를 활용했다면 UCLG 총회가 더 잘됐을 것이고, WTA도 더 성장했을 것이다.”
-WTA 출범부터 해체까지 모두 지켜봤다. 얻은 교훈이 있다면.
“분명한 주제를 가진 것은 좋았지만, 그 때문에 네트워크 확장성이 떨어졌다. 비슷한 시기 호주 브리즈번은 아시아태평양 도시정상회의(APCS)를 출범시켜 회원을 끌어모았다. 시민의 안전, 이동성, 시민주권 등 일반적인 주제들을 다뤘고, 뭐든 논의해 보자고 하면 다 논의가 됐으니 세를 키우기에 용이했다. 다자기구를 만들고자 한다면 확장성에 신경을 써야 한다.”
-대전시가 설립을 추진 중인 세계경제과학도시연합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나.
“논의를 거쳐 정해지겠지만, 저개발국이나 그런 지역을 돕는 업무를 탑재하면 좋을 것 같다. 비영리기구나 단체의 후원을 받기가 용이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대학이나 연구소, 기업에도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미 개도국 공무원을 데려다 혁신 교육을 20년 넘게 해 온 만큼 그 사업과 연계도 가능하다고 본다.”
-지방외교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대만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신주에서 WTA 회의를 한 적이 있다. ‘대전 코리아’처럼 신주 명패 밑에 타이완이라고 썼다. 그랬더니 중국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퇴장한 적이 있다. 타이완이라는 국가를 중국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쳤던 거다. 그때부터 국가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다. 극단적 사례이긴 하지만 이런 걸 보면 지방정부들이 국가 차원의 교류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 미래지향적인 교류 방식이 될 것이다.”
대전=글·사진 정민승 기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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