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축구에 열정 쏟는 선수들 힘 빠지게 하는 축구협회

김민기 기자 2023. 4. 15.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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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무궁화의 이한샘./뉴시스

2018년 9월 부산 한 호텔. 당시 프로축구 아산 무궁화 수비수였던 이한샘(34·현 충북청주FC)은 다음 날 열릴 부산 아이파크와 원정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쉬고 있던 이한샘에게 은퇴한 축구 선배 장학영(42)으로부터 “차 한 잔 마시자”는 연락이 왔다. 이한샘은 ‘후배에게 덕담을 해주려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씨는 느닷없이 “전반 30분 안에 퇴장당하면 5000만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빳빳한 현금 뭉치를 꺼내 보였다.

그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한 이한샘은 즉시 박동혁 당시 아산 감독에게 알렸고 박 감독은 경찰에 신고했다. 이한샘은 최근 본지에 “무서운 마음도 들었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돌아가도 무조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사 결과 장씨는 스포츠 도박에 연루돼 있었고 재판에 넘겨져 국민체육진흥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때 태극마크도 달았던 장학영은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영구 제명을 당해 선수로 쌓은 모든 명예를 잃었다. 이한샘은 “최근 (장학영 선배가) 어떻게 사는지 들은 이야기가 전혀 없다”고 전했다.

대한축구협회가 지난달 승부 조작 가담자 등 비리 축구인을 슬며시 사면했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다시 철회하는 물의를 빚자 5년 전 이한샘의 소신 있는 결정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광주FC 팬들은 이번 협회 ‘기습 사면’ 결정에 반발하며 지난 1일 경기장에 ‘영원히 기억될 그 이름 이한샘’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이한샘은 2021년 광주로 이적했지만 다리 부상으로 약 2년간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다. 회복을 마치고 2부 신생팀 충북청주로 옮겨 현재까지 다섯 경기를 소화했다. 이한샘은 “광주 지인들이 현수막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제대로 뛰지 못했는데도 기억해 주셔서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한샘은 이번 사면 논란을 접하고 먹먹함을 느꼈다. 그는 “프로로서 경기에 집중해야 하기에 발언에 조심스럽다”면서도 “예전 일이 많이 떠올랐고 멍했다”고 말했다. 협회가 발표했던 사면 명단 중에는 2011년 승부 조작에 연루된 48명도 있었다. 당시 파장이 커 프로축구는 존폐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승부 조작 시도는 이어졌고 장씨는 이한샘에게 손을 뻗친 것이다.

이한샘은 “나는 축구를 정말 사랑하기에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2년 데뷔한 이한샘은 이제 고참이다. 어린 선수들에게 밥을 사주며 대화하고 서로 장난도 친다. 그는 “축구를 사랑하는 생각 깊은 친구들이 더욱 많아졌다. 누구라도 나와 같은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축구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이한샘은 승부 조작 제의 같은 안 좋은 일은 겪은 사람은 자신이 마지막이길 바란다. 축구에 열정을 쏟는 이들을 협회가 씁쓸하게 만드는 일도 이제는 없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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