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꿀벌 좀 빌립시다”… 과일농가, 벌통 쟁탈전
“벌통값 2배 껑충, 부르는 게 값
예약하고 기다려야 겨우 구해”
지난 12일 오후 전북 장수군 장수읍의 한 사과 농장. 8264㎡(2500평)에 사과를 재배하는 김모(61)씨는 가지 끝에 맺힌 사과꽃 봉오리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맘때면 사과나무 사이에 벌통을 놓고 거기서 나온 꿀벌들이 꽃가루를 나르느라 분주해야 하는데, 이날도 벌 한 마리를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김씨는 “꿀벌이 움직여야 가을에 좋은 사과를 수확하는데 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과일 농사를 짓는 농가들이 꿀벌을 구하지 못해 진땀을 빼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양봉 농가에 덮친 ‘꿀벌 실종’ ‘꿀벌 폐사’ 사태 때문이다.
14일 기준으로 한국양봉협회 소속 농가에 있는 벌통 153만7270개 중 61.4%인 94만4000개에서 꿀벌이 폐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벌통 하나당 1만5000마리에서 2만마리가 사는데, 이렇게 계산하면 최소 141억6000만마리 이상의 꿀벌이 사라진 셈이다. 한국양봉학회장을 맡고 있는 안동대 정철의 식물의학과 교수는 “겨울철 기온이 높아 꽃이 빨리 폈고, 이때 월동해야 할 벌들이 채집 활동으로 체력이 소진돼 집단 폐사한 것으로 보인다”며 “벌에 달라붙어 체액을 빨아먹는 응애가 기승을 부린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전국 사과 생산량의 5%(2021년 기준)를 차지하는 장수군. 980개 농가에서 1007만㎡(304만6000여 평) 사과를 재배하는데, 대부분 농가가 벌통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박모(52·장수)씨는 “벌통 24개가 필요한데 절반도 못 구했다”며 “이대로 가면 열매 개수가 확 줄기 때문에 올해 사과 농사는 망치게 된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벌통 쟁탈전’까지 벌어진다. 양봉 업계에 따르면, 벌통 1개를 빌리는 데 보통 5만원 정도인데, 올해는 10만~11만원이 돼 두배가량으로 뛰었다. ‘얼음골 사과’로 유명한 경남 밀양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최필규(53)씨는 “귀농 10년 만에 벌이 없어서 애를 먹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강원도 양구군의 과수원 주인 김모(66)씨는 “요즘 벌통은 부르는 게 값”이라며 “웃돈을 준다고 해도 안 주고, 예약해놓고 기다려야 할 정도”라고 했다. 그는 “벌을 못 구하면 과일 생산량이 예년보다 30%가량 줄 것”이라고 했다.
벌을 못 구하면 사람 손으로 ‘인공 수분’을 해야 한다. 인공 수분은 수술에 있는 꽃가루를 암술머리로 옮겨주는 과정인데, 과일나무는 자기 꽃가루를 거부하는 성질이 있어 다른 나무의 꽃가루를 일일이 붓에 찍어 발라줘야 한다. 따라서 인건비 등을 고려하면 꿀벌을 이용한 수정보다 10배가량 비용이 더 든다고 한다. 기계로 꽃가루를 뿌리는 방법도 있지만 이 역시 꽃가루가 많이 들어 비용 부담은 마찬가지다.
경북 안동에서 10년째 양봉업과 사과 농사를 병행하고 있는 장원호(57)씨는 한때 벌통 200개를 유지했지만, 지금은 겨우 5개 정도 남았다. 장씨는 “가격이 아무리 올라도 벌이 다 죽어버려서 양봉은 사실상 중단됐다”며 “사과 농사도 꽃가루를 사서라도 뿌려야 할지, 그냥 맺히는 대로 놔둘지 고민 중이다”라고 말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응애를 잡으려고 약품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꿀벌이 약해지거나 폐사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양봉 농가는 같은 성분의 약품을 연속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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