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인류학자 韓기업서 일해보니… “MZ, 위계 싫지만 승진 열망”

김민정 기자 2023. 4. 15.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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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프렌티스 지음|이영래 옮김|안타레스|356쪽|2만원

한국 대기업은 경쟁을 과열시켜 성과를 쥐어짠다? 드라마 ‘미생’의 마부장 같은 갑질 상사가 널렸다?

한국을 연구하는 미국인 인류학자가 한국 대기업에 대한 이런 서구권의 고정관념이 실제와 거리가 있다는 내용의 책을 썼다. 마이클 프렌티스 영국 셰필드대 동아시아학부 한국학 교수의 ‘초기업(超企業·Supercorporate)’. 저자가 2014년부터 1년간 한국 철강 기업에 자리를 얻어 인턴 및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며 얻은 현장 연구 결과물이다. 야근도 하고 상사와 스크린 골프도 치며 조직을 관찰하고 직원들을 인터뷰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프렌티스 교수는 ‘위계 질서(상사가 퇴근하기 전엔 집에 못 가는 구조 등) 아래 직원들의 과잉 노동이 경제성장 발판이 됐다’는 시선은 199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오늘날 한국 대기업은 위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역량을 인정받고 계층 상승을 하고자 하는 중산층의 자발적인 열망과 이상이 집약된 공간”이라며 기존 기업의 의미를 뛰어넘은 ‘초기업’이 됐다고 했다.

◇‘꼰대 상사’ 부각이 탈위계에 동기 부여

저자는 ‘상명하복’ 질서를 중시하는 기업 내 ‘나이 든 남성 관리자’와 젊은 ‘MZ 세대 직원’의 갈등에 주목한다. 근무했던 기업의 젊은 직원들도 일명 ‘꼰대’로 불리는 ‘나이 든 관리자’의 거친 말투, 감정 기복, 자신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에 분노하는 모습 등을 희화화하며 깎아내리곤 했다. 그러나 프렌티스 교수는 ‘꼰대’가 역설적으로 기업 내 위계를 부수고 변화를 가져오는 “생산성 있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슨 뜻일까. 이런 유형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커지면서 기업이 ‘클린 카드(유흥업소에서 사용할 수 없는 법인 카드)’ 같은 제도로 이들을 통제할 명분이 되고, 젊은 관리자들은 이런 ‘낡은’ 상사를 비하하면서 자신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 애쓰더라는 것이다. ‘존댓말을 쓰고, 항상 일정한 어조를 유지하며, 회의를 커피숍에서 하고 술 마시는 회식 대신 맛집에 가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프렌티스 교수는 “낡은 정신이 새로운 기업 정신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라며 “직장 생활과 기업 관행의 개혁에 강한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무역회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저자는 “한국 대기업이 경쟁을 과열시켜 성과를 쥐어짠다는 서구의 시각은 고정관념일 뿐”이라 말한다. /tvN

다만 악당 수준의 꼰대가 일상에 수두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저자는 실제 직장 생활에서 꼰대의 전형적 이미지와 일치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다”면서, 미생의 마부장 같은 인물이 미디어에서 자주 묘사되며 생긴 혐오감이 젊은 세대와의 이분법을 낳는 측면도 있다고 분석한다.

◇위계는 싫지만 직급 상승은 원해

기업과 정부 차원에서도 ‘정시 퇴근’ 등 위계를 해체하려는 작업이 벌어지는데 거대한 기업 조직은 여전히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저자는 한국 직장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별’ 짓고 싶어 하는 열망, ‘경제적 상승’에 대한 열망이 이제는 위계를 대신해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는 서양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서술한다. 그가 일했던 기업 HR 팀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위계 질서엔 거부감이 컸지만, 능력에 관계 없이 똑같이 보상받는 수평적 구조도 거부하는 모습이 관찰됐다. 직원들은 자신의 성과를 정확히 평가받고 합당한 보상을 받길 원했다.

프렌티스 교수는 기업들의 ‘수평 호칭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던 일도 사례로 든다. 기업들이 대리, 과장, 부장 등의 직함을 없애고, 모든 직원이 이름에 ‘님’이나 ‘프로’ ‘매니저’ 등을 붙여 동일하게 부르도록 했는데, KT 등 몇몇 기업에서 수 년 만에 이를 폐기하는 사례가 나왔다. 저자는 “이들이 직급제로 회귀한 가장 큰 이유는 직원들의 사기 진작이었다”며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은 여전히 계층 이동성과 관련해 중산층의 요충지이며,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성공한 직원에 부장, 팀장 등 여러 직함이 붙는 것도 이런 ‘구별 짓기’를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서구인의 시선으로 한국 대기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다만 기업을 현지 조사하며 관찰한 내용을 정리한 연구물의 성격이 강하다. HR 비결이나 갈등 해결 방법 같은 실용적 처방을 다루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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