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16살도 어른… 방황·실패할 자유도 필요해욥”

배준용 기자 2023. 4. 1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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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한국살이 16년 된 ‘사랑꾼’
알베가 본 한국과 이탈리아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의 미래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싶다.”

2007년 3월, 한국에 있는 애인을 만나러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은 이탈리아 청년은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능숙한 중국어 실력 덕분에 밀라노의 다국적 대기업이 일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미련 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그렇게 시베리아를 지나 블라디보스토크, 다시 배를 타고 속초항에서 그녀와 재회했다.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청년은 춘천에 정착했다. 굶지 않으려 분식집 메뉴판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강원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에는 외국계 주류 회사의 영업 사원으로 서울 밤거리를 쏘다녔다. 피아트크라이슬러 코리아로 이직해 ‘알차장’으로 전국을 누비며 살다 우연히 방송에 출연했고, 16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인이자 방송인이 됐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청년 알베르토 몬디(39·이하 ‘알베’)의 결심은 어느새 현실이 됐다.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알베는 패션 잡지 속 광고에서 막 뛰쳐나온 모델 같았다. 축구 선수 출신으로 큰 키(185cm)에 탄탄하고 날렵하게 다져진 몸매. 하지만 그가 웃으며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안녕하세욥” 인사하자 옆집 사는 순박한 청년처럼 다가왔다.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가 인터뷰 중 환하게 웃는 모습. 프로 모델처럼 포즈가 자연스럽다고 하자 그는 “방송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졌다”며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철기둥 김민재가 격찬받는 이유

-요즘 김민재 덕분에 아주 바쁘다고.

“한국 분들이 영국프리미어리그(EPL)는 많이 알지만, 이탈리아 리그(세리에A)는 생소하다 보니 김민재와 세리에A에 대해 알려달라는 섭외가 부쩍 늘었다. 매일 이탈리아 주요 일간지를 읽고 현지 친구들과 연락하며 분위기를 전한다.”

-김민재의 위상은.

“엄청나다. 세리에A는 사실 정말 어려운 리그다. 그런데 김민재의 나폴리는 압도적 경기력으로 리그 1위를 달리고 있고, 그 중심에 수비 리더인 김민재가 있다. 이적하자마자 적응해 이런 활약을 보여주니 모두 놀라워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김민재가 최근 ‘대표팀보다는 소속팀에 더 집중하고 싶다’고 해 한국에서 논란이 됐다.

“사실 나폴리 팬들은 좋아하는 분위기다(웃음). 발언 전체를 보면 김민재가 국가대표가 중요하지 않다고 한 건 절대 아니고, 소속팀에 좀 더 집중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일이 좀 커져서 안타깝다. 몸과 마음이 지쳐 그런 말이 나온 거 같다.”

-당신은 세미 프로 축구 선수였다고?

“여섯 살 때 유소년팀에 들어가 열여섯 살부터 4부 리그(세리에D)에서 중앙 수비수와 측면 수비수로 활약하다 중도에 포기했다. 버텼다면 더 높이 갔겠지만 1부 리그까진 힘들었을 것 같다.”

-왜 포기했나.

“어릴 땐 ‘축구 선수는 쉽게 돈 벌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 프로 선수, 1부 리그 선수 되는 게 너무 어렵더라. 매일 훈련해야 하고 주말에는 경기를 뛰어야 하니 쉴 틈이 없었다. 식단 관리, 몸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하고. 축구에 ‘올인’해도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주변에 친구들이 주말에 여행도 가고 책도 읽고 데이트하며 여유롭게 사는 모습을 부러워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놓게 됐다.”

알베르토와 아들 레오. 레오는 육아 전문가 오은영 박사가 의뢰한 심리·지능 검사에서 상위 0.3% 영재라는 판정을 받았다. /알베르토 몬디

◇사랑 찾아 무작정 한국으로

알베는 베네치아 지방의 소도시 미라노 출신이다. 공부를 잘해 과학고를 다녔지만 사춘기 내내 철학과 문학, 축구와 음악에 빠져 살았다. 그는 “수학시간에는 라틴어로 된 문학책, 과학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시를 몰래 봤다”고 말했다.

대부분 삶에 만족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미라노가 사춘기 시절 알베에겐 답답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법대나 의대를 원한 부모님 뜻과 달리 베네치아 국립대 중국어과로 진학했다.

-왜 중국어를 택했나.

“철학을 전공하려 하니 어른들이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되려고?’ 하며 말렸다(웃음). 그래서 좋아하는 철학과 문학은 평생 취미로 가까이 두고, 전공은 독학하기 어려운 것을 찾았는데 그러다 중국어를 택하게 됐다. 중국어를 전공하니 ‘조잡한 중국산 장난감이나 팔려고?’ 같은 냉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인 교수가 중국 철학을 논하는 걸 들으면 묘한 전율을 느꼈다. 특히 노자의 도덕경은 큰 충격이었다. ‘상선약수’를 듣고 물처럼 흐르며 사는 방식을 알게 됐고, 삶의 선택이 좀 더 자유로워 졌다.”

-중국 다롄으로 교환학생을 간 게 인생의 전환점 같은데.

“그땐 학생 대부분이 베이징과 상하이로 갔다. 그런데 문득 ‘중국은 큰 나라인데 왜 꼭 거기로 가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환학생 80명 중에 나를 포함해 3명만 다롄으로 갔고,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막상 가보니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게 무색하게 현지인의 중국말을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지만, 중국 친구들과 어울리니 3개월 만에 중국어 실력이 확 늘었다. 그러다 우연히 베이징, 상하이로 간 교환학생들을 만났는데, 그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다보니 중국어가 거의 늘지 않았더라. 남들 따라가는 게 꼭 정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계기 중 하나다.”

-지금의 아내와 만나면서 한국을 알게 된 건가?

“당시 다롄에서 다니던 학교에 한국인 교환 학생이 많았고, 그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 친구들에게 처음 배운 한국말이 ‘죽겠다’였다. 숙제가 많아도 ‘죽겠다’, 술을 마시고 피곤해도 ‘죽겠다’고 하더라. 그런데 맛있는 음식을 보거나 예쁜 여자를 보면 ‘죽이네’라고 하는데, 그 당시엔 ‘죽겠네’와 ‘죽이네’가 죽도록 헷갈렸다(웃음). 학교 앞에 한국 음식점이 있었는데 비빔밥, 불고기, 파전, 삼겹살을 먹었는데 하나같이 맛있더라. 음식 취향이나 노는 방식, 음주 문화나 유머 감각도 비슷해 금세 친해졌다. 한국, 이탈리아, 스페인 학생들이 유독 잘 어울렸다.”

서울 광화문에서 <아무튼 주말>과 인터뷰하는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과 이탈리아 간에 공통점이 있나?

“사실 자세히 보면 문화적으로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자기 나라 욕을 열심히 하는데, 막상 다른 나라에서 자기 나라 욕하는 건 절대 못 보는, 내부에서 다투다가도 외부에 위협에는 확 뭉치는 애국심이 대단하다(웃음). 아무래도 반도국가에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다보니 역사적으로 외부의 침입을 많이 받은 공통점 때문인 듯 하다. 또 지형이 험하고 사계절이 있어 음식 문화도 많이 발달했고, 그래서 서로의 음식 문화에 대한 호감과 이해도도 높은 듯 하다.”

-이탈리아에서도 회를 많이 먹는다고.

“맞다. 베네치아 지역에선 가르파초(carpaccio)라고 하는데, 문어 회나 도미, 송어를 회로 많이 먹는다. 한국처럼 뒷고기와 내장, 곱창, 매운 음식도 즐긴다. 둘 다 음식 문화가 발달하고 마늘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이해도가 높은 거 같다. 가령 고추장을 먹으면 다른 외국인들은 ‘맵다’하고 지나가는데 이탈리아인들은 ‘매운데 어떻게 달콤한 맛이 나지? 신기하다!’하며 고추장을 만드는 법을 궁금해 한다.”

-지금의 아내에게 반한 이유는.

“같은 반이었는데 제일 공부를 잘하고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매력을 느꼈다. 날씬하고 눈은 작고 주근깨가 좀 있는 얼굴인데, 이탈리아에서 아주 선호하는 동양 여성 모습이다. 정작 한국인 형들은 “어? 얘가 예쁘다고? 평범한 외모인데?”라고 하더라(웃음). 한국에선 유럽의 금발 미녀를 미인이라고 하는데, 정작 이탈리아 사람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졸업하고 무작정 한국에서 살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아내를 보며 한국에 왔는데,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웃음). 영어를 할 줄 모르는데 영어로 말을 걸어 당혹스럽더라. 위축되는 나를 보다 규칙을 두 가지 정했다. ‘인간 친화적인 사람이 되자’ ‘재미있는 일을 하자’ 였다. 그래서 무작정 강원대 도서관을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우연히 영어 공부 소모임 사람들을 알게 돼 같이 술 마시며 어울렸다. 한 달 정도 어울리니 한국어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더라.”

-강원대 경제학과 석사과정 중에도 시련이 있었다고.

“대학원 입학하고 두 달 정도 지나 갈증이 심해지고 컨디션이 나빠지더니 시험을 보고 나왔는데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1형 당뇨였다. 지금의 아내, 당시 여자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져도 된다. 나는 아프니 원망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정신 차려. 헤어지긴 뭘 헤어져. 관리나 잘해!’라고 했다(웃음).”

-지금도 인슐린을 투약 중인가?

“평생 그래야 한다. 처음에는 억울했는데, 지나고 나니 오히려 고통을 겪으면서 삶에 대해 겸손을 배운 느낌이다. 100년 전이었으면 인슐린이 없어서 죽은 목숨이었을 텐데. 지금도 슬프거나 힘들 때에도 ‘이 정도 건강한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편해진다.”

◇”한국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나라”

알베는 방송인이 되기 전 한국에서 빡빡한 샐러리맨의 삶을 고스란히 겪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조세연구원에서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해 이후 외국계 맥주 회사와 피아트크라이슬러 코리아에서 영업 최전선에서 뛰어다니는 ‘영업맨’이 됐다. 2014년 시사 예능 ‘비정상회담’에 출연하면서 방송인 길을 걷게 된 것도 밤늦게 발품 팔아 영업하며 생긴 인연 덕분이었다.

-한국에 대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는 나라’라고 했다.

“조세연구원에서 일할 때 한국이 해외의 여러 정책을 치밀하게 분석해 한국에 맞게 적용할 방법을 연구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유럽은 스스로 종주국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변화에 둔감하다. 누군가는 한국의 방식을 ‘창의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겸손하고 똑똑한 방식이며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내가 한국에 막 왔을 때는 이제 한국에 카페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고구마 라테를 비롯해 카페마다 갖가지 한국식 커피와 음료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한국의 방식대로 새로운 걸 추구하는 게 한국의 강점이고 매력이다.”

-조세연구원에서 주류회사 영업 사원이 됐는데.

“아내와 결혼할 때쯤 모은 돈이 850만원 정도였다. 신혼집을 구해야 하는데 마침 외국계 주류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이직 제의를 하면서 집을 구할 5000만원 보증금을 빌려준다고 했다. 이탈리아 국민 맥주로 불리는 ‘페로니’를 파는 영업사원이었는데, 영업은 천직처럼 너무 재밌어서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매일 오전 9~10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업장을 돌아다녔다. 서울 시내 곳곳에 주차할 곳이 어디있는지 빠삭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웃음). 지금도 종종 주류회사 영업사원 했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자신만의 영업 노하우가 있었나.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자주 얼굴을 비추는 게 중요하다. 특히 비오는 날, 추운 날 처럼 손님이 없고 한가할 때 찾아가면 오히려 대화할 여유도 많고 상대방 사정을 잘 들어줄 수 있어 일이 풀리기도 하더라. 영업 사원은 체력이 좋아야 하고, 거절 당해도 기죽지 않을수록 좋다.”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에 힘든 점은 없었나.

“처음 한국의 사내 문화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유럽에선 회의 때 상급자가 물으면 하급자가 열심히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예의이고, 일이 잘 안풀렸을 때에는 원인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게 예의인 문화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렇게 했더니 ‘그럴 땐 상사한테 말대꾸하지 말고 ‘죄송하다’하고 가만히 있어라’고 하더라(웃음).”

-방송인으로 지내는 삶은.

“방송을 할수록 한국에 대해 깊이 배우게 돼 늘 감사한 마음이다. 사실 방송하기 전에는 TV 보면서 ‘연예인은 돈 쉽게 벌어서 좋겠다’고 했는데, 막상 해보니 정말 쉽지 않다(웃음). 직장 생활은 가끔식 긴장을 내려놓을 때도 있지만, 방송은 매일 긴장해야 하고 자기 관리와 몸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다. 다른 연예인도 그렇지만 ‘일이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있다.”

-한국에 살면서 모국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나?

“이탈리아에 살 때는 정치는 물론 느린 공공 서비스에 불만이 컸다. 우체국도 느리고, 기차는 연착하기 일쑤고. 그런데 나와서 살다보니 이탈리아 민간 분야, 기계공학과 제약, 명품 등이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어 뿌듯하다. 돌이켜보면 이탈리아의 교육제도도 내가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준 좋은 시스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헬조선’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해외에서 살아보면 한국이 정말 장점이 많은 나라라는 걸 알게 될 거다(웃음). 한국의 공공 서비스는 정말 빠르고 편리하고, 특히 무료 공공 화장실과 식당에서 식수를 무료로 주는 시스템은 이탈리아에 꼭 도입하고 싶을 정도다.”

서울 광화문에서 <아무튼 주말>과 인터뷰하는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에선 공교육에 대한 불만이 크다.

“이탈리아는 고등학교를 5년 다니는데, 하루에 수업은 4시간밖에 안 한다. 대신 숙제를 많이 주고 불시에 시험을 쳐서 학생들이 늘 긴장하고 스스로 공부하게 만든다. 불시에 한 번 시험을 보면 또 한 달 정도 여유가 생기는데, 그 때 독서도 하고 축구도 하고 친구 집에 놀러가서 같이 수학 문제도 풀고. 주말에는 여행도 다니고 전시회도 가고 이성과 데이트도 많이 한다. 그런 고등학교 교육이 인간으로서 많이 성장할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한국은 입시 부담이 크다.

“저는 한국의 교육이 나쁘다고만 보진 않는다. 아내한테도 ‘한국이 이렇게 대단한 선진국이 된 건 분명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어느 정도 기여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매일 아이들의 일상을 관찰해서 일지를 써주고,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는 걸 보고 감탄했다. 초등학교에서 코딩을 가르치고 방과후 수업으로 바둑, 마술 등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는 걸 보며 한국은 교육에서도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새로운 걸 도입하려 노력하는 장점이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한국의 고등학생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국은 대학 들어가기 어렵고 졸업은 쉽지만 이탈리아는 정반대다. 열네 살 때부터 방황하고 여러 경험을 한 뒤 대학에 가면 ‘이제 정신 차리고 진로를 찾아 공부해야겠다’고 한다. 한국인은 이탈리아와 반대다 보니 대학에 가서 늦은 사춘기를 겪는 거 같다.”

-이탈리아는 16살 때부터 이미 어른처럼 대우한다던데.

“맞다. 16살 때부터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방학 때 알바를 하면서 직접 돈도 번다. 나도 16살 때부턴 부모님께 용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방학 때 워터 파크에서 알바를 했다. 17살 때는 주말 새벽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바리스타를 했다. 이탈리아 고등학교는 일주일 정도 학생들에게 ‘직접 학교를 운영해보라’는 식의 교육도 한다. 한국에선 14~19살을 너무 어리게 생각하고, ‘넌 학생이니까 공부만 해. 나머진 엄마아빠가 다 해줄께’라는 분위기가 있는데, 조금 달라지면 좋지 않을까.”

-유럽은 철학 교육을 중시하는 것 같다.

“한국은 기술, 과학 교육에 집중하는 것 같고, 유럽은 철학, 문학을 더 열심히 가르치는 느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등 주요 철학자의 사상을 다 가르치고 고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워 고전을 직접 읽게 한다. 그런 교육들이 사춘기 때 인생에 대한 고민과 삶의 방향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한국에서도 철학 교육을 좀 더 강화하면 한국 청소년과 청년들의 사춘기와 삶의 고민을 잘 해결하고 행복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들 레오는 한국말과 이탈리아어를 다 잘한다고.

“아내는 한국말만 하고 나는 집에서 이탈리아어로만 말한다. 뿌리인 이탈리아어도 잘 알아야 하니까. 이탈리아어로 된 책도 많이 읽어주고 애니메이션도 많이 보여준다. 아이에게 두 언어를 가르칠 땐 자연스럽게 교감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가령 내가 영어를 잘 못 하는데 억지로 영어를 쓰면 아이와 제대로 교감하거나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알베는 자전 에세이에 “모두가 가는 길이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일부러 찾아갔더니 더 크고 많은 걸 손에 쥐게 되더라”고 썼다. 이른바 ‘알베의 법칙’이다. “한국에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답만 하면 돼)’ 분위기가 강한 거 같다. 남들이 대학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으니 너도 그래야 한다는. 그런데 대부분이 한다고 그게 꼭 정답은 아니지 않은가? 평범하지 않은 선택도 응원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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