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직지 代母’라는 영웅 신화

허윤희 문화부 차장 2023. 4.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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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우수성
근대에 대부분 외국인이 ‘발견’
그 콤플렉스 지우기 위해
한국인 영웅신화 만든건 아닐까
프랑스국립도서관 특별전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에 나온 '직지'. /연합뉴스

1970년대 프랑스 국립도서관 임시직으로 일하던 박병선(1928~2011) 박사가 도서관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던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을 처음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본지가 14일 자로 보도했다. 기사를 쓴 뒤 아침 일찍부터 문자·전화·이메일을 받았다. 학계·문화재계 여러 인사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내용인데 나서서 정정하지 않았다”며 “용기를 내줘 감사하다”고 했다. “프랑스 학자들을 만날 때 ‘왜 당신 나라에선 박병선이라는 개인을 사실과 맞지 않게 영웅화하느냐’는 항의를 받았다”고 뒤늦게 고백한 정부 관계자도 있었다. 반면 항의도 많았다. 한 독자는 “왜 이제 와서 고인을 흠집 내느냐”고 했다. “프랑스 도서관에서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 건 맞지 않느냐”고도 했다.

왜 이런 상반된 반응이 나온 것일까. 근대 이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발견’한 이들은 주로 외국인이었다. 신라 석굴암의 예술성을 발견한 이는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그는 1916년 첫 조선 여행에서 석굴암을 두 번 찾은 뒤 “오전 6시 반, 햇빛이 바다를 넘어 석굴암의 불상 얼굴에 비추었을 때, 그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라고 감탄했다. 그는 3년 뒤 ‘석굴암 조각에 대하여’란 글에서 “동양문화가 고조됐을 때 신라인들이 만든 영원한 걸작”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근대에 직지의 가치를 ‘발견’한 이는 프랑스인이었다. 19세기 말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는 다양한 고서를 수집했고, 후배 서지학자인 모리스 쿠랑에게 조선의 서적을 조사해 목록을 작성하게 했다. 플랑시는 자신이 수집한 ‘직지’를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금속활자 인쇄물’로 소개했다. 이후 프랑스 경매에 나온 직지를 매입한 앙리 베베르, 경매가 끝나고 세 번이나 베베르를 찾아가 직지를 기증해줄 것을 간청한 프랑스국립도서관장도 모두 직지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었다.

베베르는 생전 기증을 거절했다. 대신 “내가 죽으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상속자인 손자 마탱은 베베르의 모든 자료를 미국 스미스소니언 프리어박물관에 넘기면서도 ‘직지’만은 유언을 지켜 모국 도서관에 기증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952년 ‘직지’에 한국본 장서 번호 ‘109번’을 붙여 등록한다. 그만큼 체계적으로 도서를 분류해 관리해왔다는 뜻이다.

박병선 박사의 공로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1972년 12월 ‘직지’ 사진을 들고 와 국내 학자들이 연구할 길을 열었고, 프랑스 군대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를 서고에서 확인해 귀환의 단초를 마련했다.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전시 도록에는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됨’이라고 간략히 소개됐지만, 1년 뒤 열린 ‘동양의 보물’ 특별전 도록에는 비교적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첫 전시가 개최된 후 그가 들고온 직지 흑백사진 자료를 통해 손보기 선생 등 국내 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된 덕분이다.

식민의 시대를 겪은 우리는 우리 문화에 대한 ‘근대적 발견’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 콤플렉스 때문에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우리가 발견했다고 ‘신화’를 덧씌워 열광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외국인이 방치해온 우리 유물을 발견하고 찾아낸 한국인 영웅 신화에 환호하는 것은 아닐까. 생전 박병선 박사를 만나 인터뷰한 적은 없지만, 기자는 12년 전 그의 부고 기사를 썼다. 받아들이기 고통스럽더라도 사실을 바로잡는 것이 정당하게 역사와 인물을 평가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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