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古城에 현실판 호그와트 마법학교… 풍파에도 굳건한 小國

빌뉴스/김나영 기자 2023. 4.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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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발트3국’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 문화 여행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도심 전경. 도심 곳곳에서 중세 모습을 간직한 건물들을 찾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냉대 기후에 속하는 발트해안지대는 겨울과 밤이 길다. 오후 4시면 해가 지는 겨울이 11월부터 3월 초까지 계속된다. 눈과 비도 자주 내리는 탓에 4월까진 두꺼운 옷과 우산이 필수다. 발트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의 역사가 그 기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트지대는 러시아와 유럽 내륙을 잇는 요충지인 탓에 역사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련에 강제 병합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에도 꽃은 피고 어두운 밤에도 생(生)은 이어진다. 발트3국은 숱한 역경 속에서도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지켜냈다.

이 중 리투아니아는 동유럽과 북유럽 중간쯤 위치해 있는 국가다. 폴란드·벨라루스와 이웃해 있으며, 발트해를 끼고는 스웨덴을 마주하고 있다. 인구 271만 소국(小國)이지만 유로를 쓰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가입국이다. 1인당 GDP는 약 2만3000달러지만 물가는 저렴한 편이다. 한국에서 리투아니아까지 가는 직항은 없어 폴란드나 핀란드를 경유해야 한다. 겨울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3월, 긴 비행 끝에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도착했다.

구시가지 입구 ‘새벽의 문’. 성문 2층에 검은 마리아상이 있어 성지로 여겨진다. /고 빌뉴스

◇중세 유럽으로 ‘시간 여행’

빌뉴스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초기 중세 도시 모습이 온전히 남아있는 구시가지는 1994년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구시가지로 들어가기 위해선 ‘새벽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문은 16세기 초 도시를 보호하고자 성벽을 쌓으면서 만들어졌다. 지금은 성벽은 소실되고 성문만 남아 있다. 2층에 검은 성모마리아상이 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지인 이곳에선 잠시 멈춰 성호를 긋거나 기도를 드리는 행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염원이 시간을 잡아둔 것일까. 아니면 성문을 지나는 동안 몇 세기의 새벽을 거스른 것일까. 입구로 들어서니 중세 시대로 시간 여행을 한 듯한 착각이 든다. 바로크식 건물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가운데 거리를 거니는 이들의 걸음은 서울보다 느릿하다.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라 그럴까.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풀 한 포기조차 밟기 조심스럽다.

중세 유럽이라고 하면 도시 광장에 자리 잡은 성당부터 떠오른다. 빌뉴스 구시가지에도 러시아 정교회부터 가톨릭까지 각 종파의 성당이 모여 있다. 특히 성 카지미에라스 성당은 리투아니아가 거쳐 온 굴곡을 온몸으로 겪은 장소다. 17세기 가톨릭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제정 러시아 시대이던 19세기에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로 쓰였다. 이후에도 정치범 수용소, 무신론 박물관 등 쓸모가 달라졌다. 그럼에도 외관만은 굳건히 보존돼 있으니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는 그것마저 인간의 영역이라 생각해, 신보다 신을 믿는 인간을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선대 인류가 맨손으로 쌓아 올렸을 건축물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무엇에라도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구불구불 골목을 따라 세인트존스 교회로 향한다.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종탑이 있다. 높이 45m 종탑 꼭대기에 오르면 전망을 시야에 담을 수 있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순식간에 꼭대기에 다다랐다. 붉은 지붕을 얹은 건물들이 하늘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종탑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프랑스 파리가 배경인 ‘노트르담 드 파리’ 속 종지기 콰지모도가 떠올랐다. 그도 매일 이런 풍경을 봤을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도시 어딘가에서 같이 듣고 있을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그리워했을까.

트라카이 갈베 호수에 위치한 트라카이성. /고 빌뉴스

빌뉴스 인근 트라카이에도 중세 고성(古城)이 있다. 트라카이는 리투아니아의 옛 수도로, 빌뉴스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 거리. 많은 관광객이 당일치기로 방문한다. ‘숲과 호수의 도시’인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갈베 호수에 있는 트라카이성.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은 제1·2차 세계대전 등 여러 차례 전쟁으로 크게 파괴돼 1950년대에 재건했다. 방문 당시에는 꽁꽁 언 호수에 눈이 쌓여 있었지만 여름에는 붉은 성과 푸른 호수, 초록의 숲이 아름다워 휴양객들로 붐빈다. “빼어난 풍광 덕에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라고 관광 가이드 르네씨는 설명했다. 다리를 통해 걸어서 갈 수 있으며, 성인 기준 8유로를 내면 성 내부도 둘러볼 수 있다. 맑은 날이라면 보트를 타고 성 주변 호수를 도는 투어를 추천한다.

◇현실 호그와트와 1년에 하루만 존재하는 공화국

당신이 ‘해리 포터’를 보고 자랐다면, 한 번쯤 상상해본 적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입학 통지서가 우리 집으로 날아든다면? 끝내 입학 통지서를 받지 못한 ‘머글’들의 속상한 마음을 빌뉴스 대학교가 달래줄지 모른다.

1579년에 설립된 빌뉴스 대학교 구시가지 캠퍼스는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 사방으로 방향을 바꾸는 계단, 곳곳에 걸려 있는 말하는 그림 등이 호그와트와 닮아 ‘현실판 호그와트’로 불린다. 마법적 요소만 제하면 그대로 빌뉴스 대학교의 특징이 된다. 마법 없이도 400년이 넘은 건물의 고색과 퀴퀴한 곰팡내는 충분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레스코 천장화와 리투아니아 신화를 담은 벽화는 오직 빌뉴스 대학만의 특색. 천장화가 유명한 구내 서점에는 서가에 꽂힌 책만큼 사람이 많다. 지금도 학교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곳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어 관광객은 1.5유로를 내고 입장한다.

빌뉴스 대학교의 도서관 내부 모습. 천장과 벽면에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VU

판타지 세계를 빠져나와 또 다른 세계로 향한다. 이번엔 1년에 한 번만 존재하는, 지구상 가장 작은 공화국이다. 리투아니아어로 ‘강 건너편’이라는 뜻의 우주피스는 빌뉴스 구시가지에 자리한 0.60㎢ 규모의 마을이다. 뉴욕 브루클린처럼 낙후된 지역이었던 곳이지만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며 ‘힙플레이스’로 재탄생했다. ‘빌뉴스의 몽마르트르’로도 불린다.

1997년 4월 1일, 이곳에 거주하던 예술가들은 우주피스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이후 매년 만우절마다 축제가 열린다. 이날 마을 입구는 ‘국경’으로 변신해 여권 없이는 들어가지 못한다. 입구에는 우주피스 공화국의 헌법이 각기 다른 언어로 적힌 청동판이 있다. 한국어로 된 헌법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를 가진다”처럼 우리 헌법과 비슷한 조항도 있으나, 뒤이어 “모든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이해받지 못할 권리를 가진다” 등도 적혀 있다. 행복해지려고 또는 남들에게 이해받고자 아등바등하는 미물(微物)을 숙연하게 만드는, 만우절 거짓말처럼 장난기가 다분하나 ‘뼈가 있는 헌법’이었다.

우주피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에 리투아니아어로 ‘우주피스 공화국’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고 빌뉴스

◇리넨과 호박의 고장

리투아니아는 리넨으로 유명하다. 리넨은 아마의 섬유질을 뽑아 만드는 직물. 옷감, 침구류 원단 등으로 두루 쓰인다. 리투아니아에선 미네랄이 풍부한 미사질 양토와 습한 해양 기후라는 조건이 맞아떨어져 길고 튼튼한 아마가 자란다. 2세기부터 리넨을 생산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약 2000년 동안 발달시킨 직조법과 염색법, 가공법에서 리투아니아 리넨 특유의 재질과 색감이 탄생했다.

빌뉴스 곳곳에 리넨 전문점이 보였다. 옛 유대인 게토 골목에서 한 리넨 가게에 들어서니, 직원 여러 명이 가지각색의 리넨 용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사장 마리나씨는 “제품은 모두 최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리넨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최고급 수입 원단이지만 원산지인 이곳에서만큼은 저렴한 편. 지하까지 빼곡히 쌓인 제품들 속에서 차이나카라 셔츠 한 벌을 구매했다. 카운터 직원은 “천연 제품이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 분해돼 땅으로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빌뉴스 대학교 구시가지 캠퍼스의 외부 모습. /고 빌뉴스

리투아니아의 또 다른 특산품은 호박이다. 채소 호박이 아닌 광물 호박으로, 전 세계 90% 호박이 발트3국에서 생산된다. 특히 리투아니아에서 호박은 ‘리투아니아의 금’이라고 불릴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다. 리넨 상점만큼이나 호박을 파는 상점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투박한 호박 장신구를 쌓아둔 노점상부터 호박을 섬세하게 가공한 고급 보석 가게까지 그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이번 여행 일정에 동행한 현지인 에밀리야가 호박에 관한 리투아니아 전설을 들려줬다. 옛날 옛적 천둥의 신 페르쿠나스에겐 유라테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는 발트해 아래에 호박으로 지어진 궁전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느날 유라테는 카스티티스라는 어부와 사랑에 빠져 그를 수중 궁전으로 데려갔다. 딸이 인간을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안 페르쿠나스는 분노에 찬 나머지 번개를 보내 궁전을 산산조각 냈다. 이로 인해 두 연인은 영원히 폐허 속에 갇히게 됐고, 궁전의 파편인 호박이 발트해에 흩어지게 됐다는 내용이다. 리투아니아 아이들은 호박을 볼 때마다 이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떠올린다고 한다.

[감자와 비트로 만든 색다른 요리 맛볼까, 맥주 부르는 빵 튀김 먹어볼까]

북위 54° 41′(빌뉴스 기준) 리투아니아는 척박한 기후 탓에 뿌리채소를 주재료로 한 요리가 많다. 특히 비트와 감자가 흔한 식재료로, 웬만한 전통요리에는 두 식재료가 들어간다. 비트 수프 ‘살티바르시아이’와 고기로 속을 채운 감자 만두 ‘체펠리나이’, 검은 호밀빵 ‘켑타 두오나’가 리투아니아 대표 음식이다.

베이컨을 토핑으로 얹은 감자 요리 ‘체펠리나이’. /픽셀스

비트 수프는 새빨간 비트 뿌리로 만든 것이라 붉은색이 특징이다. 언뜻 보면 물감을 탄 것 같은 핫핑크색이다. 비트와 당근, 양파 등 각종 야채를 쪄내 갈아낸 뒤 잘게 썬 베이컨 조각, 크림, 어린 잎채소 등을 토핑으로 얹어 낸다. 차갑게 먹는 것이 정석이지만, 겨울에는 따뜻하게 먹을 수도 있다. 빌뉴스 중심가에 있는 다인(DINE)에선 따뜻한 비트 수프를 맛볼 수 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감자를 무궁무진하게 활용한다. 감자 푸딩, 감자 팬케이크, 감자 소시지 등 감자를 이용한 요리가 끝도 없다. 가장 대표적인 체펠리나이는 간 감자 안에 고기로 속을 채운 요리다. 구시가지에 위치한 리투아니아 전통 음식점인 ‘ETNO DAVARAS’에서 한 조각당 3.95유로에 판매한다. 꼭 전통 음식점에 가지 않아도 감자는 어느 음식점에서나, 어느 접시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스테이크를 시켜도, 생선 요리를 시켜도 감자 요리가 사이드로 나온다.

펍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고 싶다면 안주로 켑타 두오나를 추천한다. 켑타 두오나는 딱딱하고 검은 호밀빵을 튀겨 만든 음식으로,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간식이자 맥주 안주. 호밀빵을 큼직하고 네모나게 잘라 튀겨내는데, 빵에 마늘이 들어가 한국의 마늘 치킨과 흡사한 향이 난다. 이 빵을 손으로 들고 기호에 맞게 마요네즈나 치즈 등 소스를 발라 먹으면 된다. 평균적으로 리투아니아인은 1년에 110kg의 켑타 두오나를 먹는다고 한다.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펍에서 기본 안주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으며, 별도로 주문해도 대략 3유로로 저렴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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