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敵 누구인가? 더글로리 복수성공과 한강기적의 공통점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ㆍ철학 2023. 4.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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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문동은(아역 정지소)은 온몸이 가려웠다. 박연진(아역 신예은) 패거리가 고데기와 다리미로 지져놓은 화상 흉터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학교를 자퇴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나가던 동은은 연진이 자신의 몸을 지져대던 그곳, 텅 빈 강당으로 돌아갔다. 연진 일당은 제 발로 나타난 동은을 보며 당황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동은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너 꿈 말이야. 싸이월드에 써 있는 현모양처, 그거 진짜야?”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자 연진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동은이 더 모멸감을 느끼도록 본인의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한다. “난 꿈이 아니라 직업이 필요하지. 적당히 안 짜치는 그런 직업.” 동은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본 연진은 결국 되묻고 만다. “그래서? 넌 꿈이 뭔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동은은 연진을 똑바로 보며 대답한다. “너.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우리 꼭 또 보자, 박연진.”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도입부의 결정적인 한 장면이다. 끔찍한 학교 폭력을 당했던 문동은은 더 이상 피해자로만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공장에 들어가 일하고 돈을 모으면서 검정고시를 치렀다. 재수를 거듭해 교대에 들어갔고 두 차례의 낙방 끝에 임용고시에 붙었다. 이 모든 변화는 박연진이라는 ‘꿈’ 때문이다. 연진을 적으로 설정하고 정면 응시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 것이다.

일러스트=유현호

정체성(identity)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부분은 긍정적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성은 긍정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때로 정체성은 부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라이벌은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되는 적대적, 부정적 관계다.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메시의 라이벌’로 통한다. 스스로 이루어낸 업적뿐 아니라 리오넬 메시의 경쟁자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대립 관계가 평화로울 수는 없다. 특히 개인이 아닌 공동체는 더욱 그렇다. 국가적 정체성은 부정과 적대, 특히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인 움베르토 에코의 경험담을 들어보자. 그는 뉴욕에서 택시를 탔다. 아마도 9·11 이후 뒤숭숭해진 분위기 탓이었을 것이다. 택시 기사는 “이탈리아의 적이 누구냐”고 물었고, 에코는 똑 부러지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 화두를 품고 있던 그는 2008년 ‘적을 만들다’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가 속한 지식인 사회, 특히 진보 지식인들은 ‘대립’과 ‘적대’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낸다. 폭력, 배제, 탄압 같은 끔찍한 것과 맞닿아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말해서도 곤란하다. 에코가 볼 때 이탈리아 정치가 혼란에 빠진 것은 이탈리아인들이 누가 자신의 적인지 무려 60년이 넘도록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없으니 목표가 없고, 목표가 없으니 옳고 그름의 판단조차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에코는 유대인 학살, 마녀사냥, ‘빨갱이’ 탄압 등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집단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이해와 존중은 ‘다름’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르다. 때로는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우리는 정당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숨을 비롯해 많은 것을 잃고 공동체가 무너지며, 도덕의 근거 자체가 파괴된다. 대립하고 경쟁하는 적은 우리의 도덕적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뉴욕의 택시 기사처럼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대한민국의 적은 누구인가? 6·25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세대에게 그 질문은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북한이라는 적에 맞서 투쟁한 결과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문제는 1990년대부터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에 돌입했고, 냉전의 종식과 함께 세계화 시대가 시작됐다. 감성에 호소하는 민족주의가 득세하고 그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반일주의, 반미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2004년 육군사관학교에서 신입생 250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의 주적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1%p 차이로 북한을 제치고 미국이 1위를 차지했던 사건은 그 흐름의 정점이었다.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주문처럼 외울 수 있던 시대, 누가 우리의 적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그런 90년대적 사고방식은 2023년 현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작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맥도널드가 들어간 나라는 서로 전쟁하지 않는다는 ‘황금 아치 이론’은 역사적 수명을 다했다. 중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했지만 전혀 민주화되지 않았고, 북한에 쏟아진 그 많은 ‘인도적 지원’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대한민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지닌 어떤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일본을 적으로 삼는 역사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무시한 채 상상 속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에 놓는 역사관을 꾸준히 설파한다. 그것은 역사라기보다 소설에 가깝다.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 같은 민족에게 침략당했고, 북한을 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정체성은 반공주의와 그로 인한 희생자를 낳았으며, 이는 우리가 반성해야 할 아픈 과거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나라일 수는 없다.

‘더 글로리’로 돌아가 보자. 어른이 되어 만난 동은에게 연진은 악을 쓴다. “넌 외려 나한테 감사해야 돼. 내 덕에 선생도 되고, 이 악물고 팔자 바꿀 동기 만들어 준 게 죄야?” 실로 뻔뻔한 소리다. 하지만 적과 정체성, 도덕의 입체적 관계를 또렷하게 보여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오늘의 영광, 대한민국의 ‘더 글로리’는,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데기를 손에 쥐고 깔깔거리던 연진처럼 북한은 핵무기를 틀어쥐고 폭언을 퍼부으며 무력 도발을 일삼고 있다. 우리의 복수는, 영광의 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정태의 시사哲'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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